우리는 ‘모든 백조가 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든 백조를 다 관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표적인 표본군을 생각하고 몇 가지의 경험을 통하여 백조가 희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영국 사람이 호주에 가서 백조와 완전히 일치하는 동물이 검은 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백조는 항상 희다는 명제와 부합하지 않는 사실이 발생한 것이지요.

데이빗 흄(David Hume, 1711-1776)이라는 영국의 사상가는 귀납법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는 회의주의자(Skeptic)답게 구체적인 사실을 관찰하여 일반적인 진리를 얻는 귀납법(Induction)에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는 또한 인간이 가진 ‘이성(Reason)’의 한계가 분명하여 진리를 결정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상가가 결론 내린 이성의 한계는 사실상 우리의 믿음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기회가 됩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는 모두 울었으며, 예수님도 함께 인간의 죽음이라는 비참과 한계성 앞에서 눈물지으셨습니다. 장례식에 온 동네 사람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물은 죽음 앞에 선 절망적인 울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로 작정하셨고, 그렇게 될 것을 믿고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눈물은 오히려 죽음 앞에서 속수무책인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긍휼의 눈물이었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요 11:39),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 “나사로야 나오라”(43), 그리고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44)는 주님의 명령은 상식과 과학의 정리와 자연법칙과 죽음의 왕노릇과 인간의 불가능성을 한 번에 날려버리는 기적 창출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죽으면 일어날 수 없다는 일반적인 생각과 경험을 부스러뜨리는 놀라운 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에녹과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어졌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처럼 우리 성도들도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의 많은 기록들은 상식과 과학의 법칙들을 뛰어넘습니다. 이를 위하여 이성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는 것은 종종 실수를 포함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죽음은 절망스런 것입니다. 나사로는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냄새가 나던 그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나사로는 절망의 상황에서 소망의 반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이름은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절망은 우리의 사전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 즉 ‘하나님의 도움’을 다시 일으켰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