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주일예배 시간에 드럼과 각종 악기로 연주하는 시끄러운 음악을 오르간과 피아노 위주의 경건한 음악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방지일 목사님과 랄프 윈터 박사님이 강하게 지적한 것이다.
둘째, 주일 오후 예배를 주일 저녁 예배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키는 ‘주일성수’를 회복하는 것인데 방지일 목사님이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다.
셋째, 현세적인 성공과 축복 중심의 메시지를 십자가 중심의 복음적 메시지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최복규 목사님과 이영훈 목사님 등이 강하게 지적한 것이다.
넷째, 현세적이고 정치·경제·문화적인 관심으로부터 종말적이고 내세적인 천국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신약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우선적인 관심이었고 김삼환 목사님이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다.
다섯째, ‘빛과 소금’이라는 말을 ‘소금과 빛’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순서를 바꾸는 것이고 암암리에 자기 부정과 희생보다는 자기 긍정과 현현을 바라는 인간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여섯째, ‘묵상 기도’라는 말을 ‘묵도’ 라는 말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옳지만 기도를 묵상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박종렬 목사님이 강하게 지적한 것이다. 느헤미야가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했다”(느 2:4)고 했다.
일곱째, 화려한 예배를 드리면서 진리의 깃발을 휘날리는 것을 긍휼과 은혜와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 이전에 은혜가 충만했고(요 1:14), 제사 이전에 긍휼을 원하셨고(마 9:13),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마 6:44). 이것을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이 지적하며 실천했다.
여덟째, 나의 옳음을 강조하고 나와 다른 상대방의 그름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위선과 교만과 분열의 자세를 이단이 아닌 다양한 모든 교회와 모든 신자들을 품으려는 온유와 겸손과 연합의 자세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십자가가 이룬 것이 바로 화해와 연합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경직 목사님과 정진경 목사님이 강조했다.
아홉째, 너무 부해지고 강해지고 커지려고 하는 욕망을 가난해지고 약해지고 작아지려는 소원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주님과 사도 바울과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지닌 모습이었다. 또한 이것이 교회가 세상과 친근해지는 비결이기도 하다. 교회와 교회당을 무한대로 대형화하려는 것을 중단하고 이제는 가난하고 약하고 작은 교회들과 연대하며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열째, 과시적인 행사 위주에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 위주의 삶과 사역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주님과 선배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위선적이고 과시적이고 배타적인 죄를 진솔하게 뉘우치면서 회개하는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다윗과 사도 바울과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 등이 지녔던 제물 된 삶이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설날 저녁에)
둘째, 주일 오후 예배를 주일 저녁 예배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키는 ‘주일성수’를 회복하는 것인데 방지일 목사님이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다.
셋째, 현세적인 성공과 축복 중심의 메시지를 십자가 중심의 복음적 메시지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최복규 목사님과 이영훈 목사님 등이 강하게 지적한 것이다.
넷째, 현세적이고 정치·경제·문화적인 관심으로부터 종말적이고 내세적인 천국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신약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우선적인 관심이었고 김삼환 목사님이 분명하게 지적한 것이다.
다섯째, ‘빛과 소금’이라는 말을 ‘소금과 빛’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순서를 바꾸는 것이고 암암리에 자기 부정과 희생보다는 자기 긍정과 현현을 바라는 인간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여섯째, ‘묵상 기도’라는 말을 ‘묵도’ 라는 말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옳지만 기도를 묵상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박종렬 목사님이 강하게 지적한 것이다. 느헤미야가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했다”(느 2:4)고 했다.
일곱째, 화려한 예배를 드리면서 진리의 깃발을 휘날리는 것을 긍휼과 은혜와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 이전에 은혜가 충만했고(요 1:14), 제사 이전에 긍휼을 원하셨고(마 9:13),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마 6:44). 이것을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이 지적하며 실천했다.
여덟째, 나의 옳음을 강조하고 나와 다른 상대방의 그름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위선과 교만과 분열의 자세를 이단이 아닌 다양한 모든 교회와 모든 신자들을 품으려는 온유와 겸손과 연합의 자세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십자가가 이룬 것이 바로 화해와 연합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경직 목사님과 정진경 목사님이 강조했다.
아홉째, 너무 부해지고 강해지고 커지려고 하는 욕망을 가난해지고 약해지고 작아지려는 소원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주님과 사도 바울과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지닌 모습이었다. 또한 이것이 교회가 세상과 친근해지는 비결이기도 하다. 교회와 교회당을 무한대로 대형화하려는 것을 중단하고 이제는 가난하고 약하고 작은 교회들과 연대하며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열째, 과시적인 행사 위주에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 위주의 삶과 사역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주님과 선배들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위선적이고 과시적이고 배타적인 죄를 진솔하게 뉘우치면서 회개하는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다윗과 사도 바울과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 등이 지녔던 제물 된 삶이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설날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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