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스페인의 프란시스꼬 삐사로에게 정복당한 볼리비아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잉카제국의 일부였다. 볼리비아란 이름은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풍운의 볼리바르는 정치 불안정, 독재, 경제적 어려움과 싸워 1825년 독립국가를 세웠다. 독립이후 1981년까지 총 193번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거의 열달에 한번꼴로 정권이 바뀐셈이다. 그럴때마다 경제적인 혼란도 가중되어서 한때 14,000% 라는 살인적 인플레이션이 있었던 나라다.

칠레와 벌인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리또랄 해안지역을 잃어버려 1879년 이후 내륙국가가 되었다. 강으로 대서양과 간신히 연결되었는데, 안데스에서 흘러내린 강이 파라과이를 거쳐 아르헨티나 리오 쁠라따 앞으로 빠져 나간다. 남미 대륙에서 두번째로 높은 네바도 사하마 산(6,542 m)은 설산으로 강원도같은 오루로 주에 있다. 수도 라 빠스(La Paz, 평화)는 백두산보다 1.5배 높은 3,800 m 에 숨가쁘게 펼쳐있고, 라 빠스 내에서도 대표적인 달동네인 엘 알또(el Alto)는 해발 4,000 m 가 넘는다.

인구 900만의 볼리비아는 남미 대륙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절반의 인구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고있다. 전체 인구중 75%가 빈곤층이다. 중산층은 15% 이고, 10% 부유층이 부와 권력을 독점한다. 볼리비아 인구의 65%가 아이마라, 케추아 같은 인디오 원주민들이다.

빈번한 쿠데타와 극심한 가난이 오랜 관행처럼 남아있는 볼리비아에 인디오 원주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54%라는 기록적 득표율로 첫번째 인디오 출신 대통령이 권좌에 올랐다. 꼬까(coca) 재배 농장 노동자 출신인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는 그 자신이 극한 가난을 경험한 사람이다. 가난때문에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사회주의 운동당(MAS)를 이끌면서 부정부패로 오명이 가득한 볼리비아의 역사를 새롭게 쓰겠다고 공약한다. 스페인 꽁께스따도르(정복자)에 의해 정복된 이후 500년 동안 핍박과 차별의 설움 속에서 가난을 운명처럼 달고 살아온 원주민들의 불행한 삶에 종지부를 찍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La Union es la fuerza’ (단결은 국력)이라는 국가적인 표어아래 무궁무진한 지하자원을 활용하여 부를 창출하고, 공정하게 분배한다면 남미에서도 손꼽히는 선진국가가 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GDP 전체 101위, 일인당 125위라는 초라한 경제 성적표를 받아들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매장량에 있어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은과 주석 광산, 광할한 싼따 꾸르스 지역에 매장된 석유와 천연개스 자원이 넘쳐남에도 극한 가난(extreme poverty)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 사회에걸쳐 오랫동안 관행처럼 굳어진 부정부패가 주요 원인이다.

본래 부패란,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유기물이 미생물의 작용에 의해 악취를 뿜어내며 분해되는 현상을 말한다. 정복자들에의해 수백년에 걸쳐 밑바닥까지 긁어내는 수탈을 당하면서 길들여진 부끄럽고 수치스런 과거에다 인간의 탐욕이 섞이면서 부정부패란 악취를 풍기며 국력을 쇠락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새벽 5시부터 대통령궁의 불을 환히 밝히며 일을 시작하는 인디오 출신 대통령은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방만한 정부조직을 개편하고, 복지부동하면서 가렴주구하는 기득권 세력과의 피튀기는 전면 전쟁에 돌입하였다.

사회주의 외 다른 해법이 없다고 고심하는 에보, 고위 공직자부터 하후상박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자신을 비롯한 각료들의 월급을 대폭 깎았다. 국가수반인 그의 월급이 1,800달러다. 과거 정권이 다국적 기업에 수의계약으로 헐값에 넘긴 천연가스, 통신, 전기, 철도, 항공 등 핵심분야 기업체를 다시 국영화 하려는 심각한 줄다리기도 벌이고 있다.

부패 청산, 지독한 빈곤 타파라는 두 과제를 짊어진 에보의 어깨가 무겁기만 하다.

(도시빈민 구제와 선교 참여 703-622-2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