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에서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바울과 어거스틴과 함께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는 당대 사람들에게 존경과 찬사를 받았던 최대의 지성인이요, 기라성같은 카톨릭 신학자들을 무너뜨린 최고의 신학자요, 제너바에 개혁의 바람을 일으킨 뛰어난 개혁자요, 영혼을 뜨겁게 사랑한 참된 목회자요, 성경을 바로 주석하여 삶에 옮긴 실천적인 주석가요, 삶 전체로 메시지를 증거한 살아있는 설교자였다.

칼빈은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가장 탁월하게 구사한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오늘날의 프랑스어는 그가 모국어로 번역한 기독교 강요의 방대한 언어에 힘입은바 크다. 그러나 칼빈은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할 정도의 병쟁이였다. 그는 일생 동안 코감기, 천식, 소화불량, 두통, 관절염, 궤양성 치질, 결석병, 악성 폐렴, 늑막염 등 각종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는 끊임없이 육신을 괴롭히는 질병의 고통 가운데서도 철저한 절제와 금식을 통해 자기를 훈련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매일 성경을 연구하고, 금식과 묵상으로 일관하면서 경건을 추구해 나갔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몸을 돌보지 않고 절제된 삶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시간이나 물질도 허비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았으며, 설교나 저술 작업을 위해서 밤새도록 연구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극심한 가난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책을 내다 팔 정도였지만 철저하게 경건 생활을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노용에서 태어나 1564년에 죽었으니 55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으니 오늘날의 수명에 비하면, 그는 매우 짧은 연수를 보낸 불행한 사람이다. 더욱이 그가 세상에 남겨둔 유산은 미화로 2천불 정도에 불과했고, 거기에다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장례식에 화려한 치장을 하거나, 묘비도 만들지 말도록 유언했다. 그러므로 칼빈의 위대성을 구태여 따진다면 현대 모든 교회 신학에 영향을 준 기독교 강요라고 하기 보다는 그가 평생 동안 쌓았던 경건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칼빈 시대에 제너바에서 목회했던 ‘콜라동’은 이렇게 증언했다. “칼빈은 자기 몸을 사리지 않았으며 건강의 상태를 돌보지 않고 힘에 지나도록 일하였다. 그는 매일 설교하였고, 매주 세 번 신학 강의를 하였다. 그는 반드시 병자를 방문하였고, 개인적인 충고와 권면, 그외 목회 활동 중 통상 생길 수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진력하였다. 그 모든 일들로 인해 칼빈은 특별한 연구를 계속할 수 없었고, 탁월하고 유용한 책들을 많이 저술하지 못했다.”

칼빈 외에도 평생 병마에 시달리면서 살았지만 위대한 정신, 사상, 문화 예술 창달에 공헌한 사람들이 많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1770년 12월 17일에 태어나 1827년 3월 26일에 죽었으니 그도 육십을 채우지 못한 짧은 인생을 살다 갔다. 1796년 베토벤은 26세의 청년기에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 그는 심각한 귀울음(耳鳴)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이로서 사람들과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왜 청력을 잃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청력 상실은 심해졌다.

이에 관한 확실한 일화가 있는데, 자신의 교향곡 9번을 초연할 때 연주가 끝나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그는 객석을 향해 뒤돌아서자 그제서야 관객들이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고 있음을 보았으며 그러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어도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수지맞는 돈벌이 수단이던 공연 연주는 점점 어려워졌다. 1811년에 그는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로 그는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 이전 시대에 알지 못하던 수많은 병들이 창궐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어서 속히 치료제나 치료술들이 발견되기 바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걸어다는 종합병원과 같은 자라도 인간 내면의 숭고한 정신 마저 앗아 갈 수 없다는 확실한 예를 칼빈과 베토벤을 통해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