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어이없게 지나가 버린 느낌이다. 이렇게 효율성 없이. 이래서 되겠는가? 하루가 저물어 갈수록 마음 한켠이 허해졌다. 4시가 지나자 더이상 사무실을 지키고 있어봐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가방을 싸서 문을 나섰다. 셔틀버스를 기다리는데 오늘 따라 5분도 채 안되서 와주었다. 정해진 시간 없이 15분 마다 한번씩 오는 버스이기 때문에 어느 때는 15분도 기다린 적이 있다. 5분이면 정말 운이 좋은 날이다.

집에 가는 길에 요한 전도회 어느 집사님께 계속 전화를 했다. 문학의 밤 일로 잠깐 가게에 들러도 되냐고 물으려고. 근데 여러 번 시도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럴 때는 꼭 혹 일부러 받지 않는거 아냐 하는 의심이 살짝 들어온다. 그러다가 아니지 한다. 결국 통화가 됐는데 잠을 좀 잔 후 이제야 가게에 다시 나오시는 거란다. 문학의 밤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나는 “나 오늘 참 마음이 허하네요?” 했다. 장난반 진심반으로 내 말을 받으시는 것이 느껴졌다. 데이빗에게 내가 잘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아침에 데이빗과 조금 말다툼이 있었더랬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즐겁고 편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미안하고, 크리스챤으로서 참을성 없고 인자하지 못한 모습을 데이빗한테 보여서는 안되는데 하는 생각에 죄책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리고 말은 안했지만 한국이 자꾸 사무치게 그리워져 온다. 친구들이 보고 싶고, 한국의 강산이 괜히 그리워진다. 한국의 정서, 전라도의 구수한 사투리, 한국 교회의 뜨거운 기도 모임 등등, 왜일까 요즘들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나의 마음 한구석에 구멍을 뚫어 놓은 걸까?

그 집사님이 갑자기 팥빙수 만들어 줄까요 한다. 거절하지 않겠다고 하자, 팔을 걷어 붙이고 부엌으로 가시더니 멋진 팥빙수를 만들어 오셨다. 감탄을 연발하며 정말 맛있게 먹었다. 집사님이 물으셨다. 이제 허함이 가셨냐고. “그런 것도 같네!” 라고 답했다. 10년 만에 먹어본 팥빙수와 집사님의 위트있는 물음이 마음을 따스하게 덥힌다.

집에 와서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나자 전도회의 이 집사님께서 어제 아내 집사님이 두고 가신 가방을 가시러 오셨다. 지난번 누가 주신 오이지를 나누어서 작은 그릇에 담아 가방과 함께 드렸더니 고맙다는 말을 서너번이나 하시고서야 차 문을 여신다. 남이 준 것으로 생색내는 것 같아 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서로 작은 것이지만 얻어 먹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것이 얼마나 정겹고 사람다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마음이 따스해졌다.

아이들이 잠들고 9시가 훨씬 넘었는데 누군가가 벨을 울린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이번에는 누구?... 커튼을 열어 누군가 하고 확인해 보았더니 성가대에서 같이 봉사하고 있는 한 집사님이시다. 지난번 집에 초대하려다가 못해서 미안했다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오신 거다. 들어 왔다 가시라는 말을 뿌리치시고 너무 늦은 시각에 와서 미안하다면서 서둘러 떠나시는 집사님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찡해졌다. 나중에 집사님이 가져오신 것을 열어 보니, 닭죽과 육개장이었다. 이제 막 끓여서 바로 가져 오신 듯 둘 다 따끈따끈했다. 그리고 다른 봉지에 뭔가가 담겨 있어 봤더니 집에서 키우신 듯한 싱싱한 깻잎과 고추가 여럿 들어 있다. 집사님의 사려 깊은 배려가 느껴졌다. 닭죽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고는 마침내 나는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참고 있는 줄도 몰랐던 울음이었다.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가.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서로간에 정을 확인하고 사랑을 키우는 주의 형제 자매들. 하나님은 이렇게 다시 한번 나를 안으시고 위로하셨다. 오늘 저녁 이 세 천사를 보내 주심으로.

어느새 하루 종일 나를 억눌렀던 마음의 허함은 간데 없이 사라졌다.

/김성희(볼티모어 한인장로교회의 집사이자 요한전도회 문서부장.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메릴랜드 주립대학 의과대학에서 연구 행정원으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