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지도력의 기준 중에 하나는 판단과 분별의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먼저 판단은 율법이 기준이요 행위주의의 산물인 까닭에 그 결과로 나타나는 상처는 매우 심각하다.

곧 나의 의의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을 재는 까닭이다. 그런데 흥미있는 현상은 판단받는자 보다는 오히려 판단자가 그 판단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교제권을 잃고 영적 낭인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정치 세계에서 이러한 영적 낭인이 되어 괴로워 하는 이들을 많이 보게 된다. 작금에 한국에서 소위 이단 감별사라 하는 사람들이 처한 형편이 그것이다. 예수님은 정죄를 경계하시면서 남을 판단하지 말라 하셨다. 판단은 분노나 미움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편견이나 몰이해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판단의 영에 지배를 받게 되면 잘못은 누군가에게 전가하되 책임은 지려 하지 않는다. 주위를 비난하지만 용서나 화해를 위해 노력은 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판단은 엄격한 과학적 증거를 필요로 하나 영적 세계에서는 태반이 뜬소문에서 오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판단은 언제나 중지되어야 함이 옳다.

반면에 영적 지도력은 반드시 의와 불의, 지혜와 무지, 옳고 그름을 분별해야 한다. 분별은 판단과 달리 하나님이 주시는 일반적인 은사로서 예수믿는 이에게는 다소간에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인 까닭에 이 분별의 은사를 행사할 수 있다. 분별함은 그 출발선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은혜인 까닭에 그 결과는 치유와 회복 그리고 교제의 완성으로 나타난다. 이는 전적으로 성령님이 주시는 좋은 마음인 까닭에 주저함 없이 행사하여야 한다. 분별의 은사를 행사하면 개인과 공동체가 행복해지고 영계가 맑아지며 화목할 수 있다.

우선 분별은 사실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 어떤 사건의 결과물로서 옳고 그름의 구분은 분명하다. 하늘과 땅이 반대개념이고 물과 불이, 동과 서의 구분이 뚜렷하듯 말이다. 이런 일차원적 분별력없는 영적 지도력은 곤란하다. 부언컨대 분별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개념이 아닌 까닭에 반드시 행사하여야 공동체를 건전하고 건강하게 지켜 나갈 수 있다.

학자 중에는 이 분별력을 태생적으로 갖지 못한 사이코패스적 인물이 있다 한다. 이들은 일반인들의 뇌구조하고는 다르다고 하니 제하고라도 즈음에는 평범한 사람들조차 이런 일차원적인 분별력을 상실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아마도 이것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영계의 가치관의 혼란에서 온 것일 게다.

일테면 ‘큰 것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며 작은 것은 추하고 나쁜 것이다.’ 그래서 크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서되고 용납되는 세상이 되었다. 크면 안수 기도하여 금이빨 만든다 소문내어 혹세무민하고 연약한 영혼 몰이해도 좋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교협의 신학분과나 윤리분과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적 지도력이 판단하지 않는 다해서 분별력이 없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쓰면서 로마의 철학자 시세로가 했다는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O tempora! O mores!(오 세월이여 오 풍속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