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제자 훈련 모임에서 요즈음 토론되는 주제가 '큰 아들의 귀향'입니다. 탕자의 비유 가운데 아버지께 돌아와야 할 사람은 소위 탕자로 알려진 작은 아들뿐 아니라, 큰 아들도 해당된다는 것이지요. 헨리 뉴우엔은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 이란 그림과의 우연한 만남 이후 내면세계의 눈이 크게 떠지며 ‘탕자의 귀향" 이란 역작을 집필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작은 아들 외에 큰 아들의 모습을 심도 있게 분석합니다. "내가 아버지를 수년간 충성되이 섬기고, 아버지의 명을 거역한 바 없다"고 고백하는 그의 말처럼, 큰 아들은 표면적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항상 경쟁의식, 비교 의식, 의심, 그로 인한 분노, 원망, 불평, 불만 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기쁨이 없이 형식적으로 아버지의 집을 섬기는 큰 아들 역시 돌아와야 할 탕자입니다.

이번 제자훈련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자신이 큰 아들이었다는 내면의 고백을 하셨습니다. "헨리 뉴우엔이 묘사하는 큰 아들의 모습을 보며 내 자신을 보는 것 같이 발가벗겨진 느낌" 이었다는 고백 등이 압도적으로 많았지요. 저는 이번 제자훈련을 인도하며, 현대 교회의 진정한 문제는 "돌아오지 않는 큰 아들" 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 문제들은 집 나갔던 탕자 작은아들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의로 충만한 큰 아들이 대부분 문제의 원인이지요. 이들은 하나님이나 교회의 대접이 자기 의에 비하여 소홀하다고 원망하는 만성 불평에 사로잡혀 비판과 분리의 영에 쉽게 조종당하며 분란을 일으키곤 합니다.

큰 아들도 귀향해야 합니다. 헨리 뉴우엔도 자신이 큰 아들에 가깝다고 고백하며 큰 아들의 귀향에 대한 몇 가지 제언을 하는데,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무엇보다, 큰 아들도 자신이 아버지를 떠나 있는 탕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큰 아들은 자신은 의롭고, 저 사람은 죄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자신도 하나님 떠난 죄인임을 인정해야 회복의 길이 열립니다. 욥의 회복 역시, 자신이 의롭다고 목청을 높이던 그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에 아버지께로의 귀향을 사모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의 품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번 제자훈련과정을 인도하며 특히 눅 15:51, 큰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고백이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맞는 말씀이지요. 늘 나와 함께 하시며, 당신의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 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나를 그리도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할렐루야! 그저 기뻐하고 찬양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큰 아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헨리 뉴우엔의 제안대로 신뢰와 감사를 훈련해야합니다. 나의 감정과 상처 속에서 여전히 원망에 잠겨 있을 때에도 감사를 선택해야 합니다. 요즈음, 저는 원망과 감사 사이에서 감사를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훈련을 하는 중인데, 헨리 뉴우엔의 고백처럼, 원망대신 감사를 선택해야 할 상황이 얼마나 많은 지 놀라는 중입니다. 이 훈련을 지속하면서 느끼는 점은 그 어떤 불평스럽고 원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나의 생각과 관점을 바꾸기만 한다면 항상 감사의 제목이 동일한 상황에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램브란트의 그림 중에서 아버지와 동일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큰 아들이라는 사실을 묵상하며, 큰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올 때 그는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 된다는 헨리 뉴우엔의 지적은 탁월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큰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하시며 그의 손에 하나님의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신뢰와 감사를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훈련을 평생 지속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언젠가 예수님과 가장 닮은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