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을 할수록 나의 부족한 모습 때문에 부끄러움이 노출되고 흉측하게 갈기갈기 찢어져 나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왜일까 문학의 밤을 준비하던 중에는 참 기뻤는데 막상 마치고 나서는 헐벗고 상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부끄러워졌다. 비실비실 쓰러질 것만 같았다. 도움을 구하느라고 두리번 거려본다. 혹 하늘에서 동아줄이라도 내려와서 그 옛날이야기에 나온 그 어린 소녀처럼 그대로 그 줄을 잡고 하늘로 올라 갈 수 있으면 싶기도 하고. 여전히 내밀어진 내 차가운 손, 누군가 따스하게 잡아주면 좋을 텐데… 마치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허우적거리며, 주변에 산재한 위험 때문에 발을 쉽게 내딛지 못하는 것과 같은 나의 연약한 모습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은 다 연약한 양들이다.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나는 강하다고. 나는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고. 나는 절대 유혹받지 않는다고.

누가 완벽한가. 완벽한 이는 우리 예수님뿐이다. 아마도 그 날에, 우리가 그분을 뵈올 그 날에는 우리도 혹 완벽해 질까? 그러나 아직 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모두 ‘완벽’을 향해 가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들이지, 완전한 존재로서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부족한 사람들끼리 부대끼며 이해하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렇게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지 않을까.

강하고 완벽해 보이는 목사님이나 사모님들 일지라도 때로는 삶을 고달파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고난의 긴 긴 통로를 외로이 걸어가시는 그 분들. 그 분들의 외로움의 깊이를, 그분들의 고민의 정도를 누가 알아줄까? 하나님뿐이겠지.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도움을 순간순간 받아야 하는, 상처받기 쉽고 그로 인해 쓰러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들이다.

그러니 아, 저 구석에서 외로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소외된 자에게 손을 내밀어 보자.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찾아가 보자. 나 자신을 텅 비우면 더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쉽지 않을까? 화려한 이유들로 나 자신을 꽁꽁 묶어 버리지 말고, 훌훌 자유롭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 묻지 말고 가보자.

내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듯이 저 혼자 서 있는 자매도, 저 형제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내가 외로워하듯이 저들도 외로워하고 있을 지도. 누군가 다가와 친구가 되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함께 모여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해주기를 그들의 영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삶은 참 혼동스럽다. 이렇게 소외된 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나도 그들을 찾아가는 것이 나의 삶의 첫 순위는 아니다. 나는 나를 먼저 챙기고, 나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서 나발을 불어 댄다. 하지만 남의 외로움은 정말 무시하며 산다. 이기심으로 찌든 내가 이기심으로 찌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 듯도 싶다. 내 것은 내 것이다라는 이기적인 논리. 언제부터 인간의 소유욕이 그처럼 강하게 된 걸까? 내 것의 경계를 확실히 지우고 그 경계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거나 그 경계 안에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이 앗아 가려고 하면 눈을 치켜세우며 도전한다. 어디까지가 사람이 만들어낸 문화이고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뜻인가? 그저 혼동스럽다. 역시 부족한 우리들이다.

나는 이 글을 이렇게 맺을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결론이 없다. 억지로 짜맞춰서 결론을 내리고 싶지도 않다. 그저 우리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겸손히 나를 비우는 노력을 서서히 해나가는 것이 좋겠다. ‘완벽’을 향해서 가는 길은 길고 먼 여정일 것이다. 하루아침에 완성될 것이 아니니, 조급함을 가지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꾸준히 훈련을 받아가자.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다른 편 뺨도 내밀 정도로 겸손한 배짱을 가진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우린… 다… 불완전하다.

/김성희(볼티모어 한인장로교회의 집사이자 요한전도회 문서부장.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메릴랜드 주립대학 의과대학에서 연구 행정원으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