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의 유명한 소설 「좁은 문」을 한번씩 다 읽어 보셨을 것이다. 1909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지드 자신의 실제 생활을 바탕으로 쓰여진 자기 고백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젊은 시절의 지드 자신의 청교도적인 금욕주의와 지나치게 민감한 감성으로 고민하던 지드의 자화상(自畵像)이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다. 노르망디(Normandie) 지방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외사촌 남매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그의 실제 생활과도 거의 비슷해 지드도 '좁은문'의 주인공 제롬처럼 외사촌 누이 마들렌과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그러나 지드는 마들렌과 결혼해서 평생을 함께 살았던 반면에 좁은 문에서는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을 비극으로 끝맺는다.

이 소설은 한마디로 현실이 윤리의 좁은 문을 통과 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을 다루고 있다. 이 같은 앙드레 지드의 고민은 오늘의 현실에서는 맞지 않는 케케묵은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 이런류의 좁은 문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한국 드라마뿐 아니라 전 세계의 드라마가 정도를 넘은 불륜을 주제로 삼은지가 오래 되어 버려 앙드레 지드가 생각한 좁은 문은 이미 좁은 문이 아니라 넓은 문이 되어 버렸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2천년 전에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 될 수가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루살렘의 예수 탄생 기념교회의 문은 아주 작은 좁은 문이다. 그래서 누구든 이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겸손히 고개를 숙이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문들은 얼마나 넓은가? 실용적 문 말고도 영적으로도 이미 예수 믿는 길을 넓은 문, 넓은 길로 만든지 오래 되었다. 한국 교회의 기복 신앙은 교회의 문을 큰 문으로 만들고 넓은 길로 만드는데 일조를 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한국 교회는 지금 신음하고 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물밀듯이 예수 없이 교회에 다니는 출석 교인들이 되어서 넓은 길로 가기 때문이다. 팔 벌려 그 길은 멸망의 길이니 스톱 되돌아가라고 그리고 좁은 문 협착한 길을 가라고 외치면 도도한 그 행렬에 밟혀 죽을 것이기 때문에 감히 순교하려는 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를 잘 믿으면 물질의 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런 물질의 복은 성경적 기준에 보면 하급의 복이다. 예수 믿는 길은 고난의 길이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길이기 때문에 어려운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 질 중에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좁은 문 협착한 파킹랏에 협소한 교육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모든 분들에게 생명의 문, 생명 길의 충만한 복이 함께하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