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포스트 모던의 시대를 질주하는 중이다.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잘 표출할 수 있는 대상과 인식의 폭이 과거에 비해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넓어 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울러 문화의 분배가 상류층에만 쏠림 현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평준화 되었다는 반증이기도하다. 이런 수평의 시대에 보편화되어가고 있는 현상 중에 하나가 웰빙이다. 특히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웰빙에 대한 욕구는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닌 중이하의 계층에서도 노력만 하면 건강한 삶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면서 웰빙이란 단어 보다 새롭게 인식되고 부각되는 어휘가 있다면 웰 다잉 이다. 참 좋은 현상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잘 죽는가에서 내용 있고 가치 있는 죽음에 대한 의미를 유추케 하는 신조어라 하겠다.

그런데 웰 다잉이란 희망 속에 복병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의 문제일 것이다. 그만큼 고통은 파괴력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글쎄, 웰 다잉..., 고통 없이 죽으면 웰-다잉으로 가는 것일까? 고통 없는 죽음을 누구라도 장담할 수 있을까? 그만큼 고통이 덜한 짧은 죽음으로 가는 호상(好喪)을 경험을 하는 사람들 보단 베드에서 오랜 시간을 앓다가 욕창으로 고생하면서 어렵게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시는 분들을 종종 보아온 터에, 웰 다잉, 역시 인간의 의지로 와지는 것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고통 없는 죽음, 또는 고통이 짧은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 간단치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구구팔팔이삼사’를 기도 제목 삼을 만큼 신자라도 고통 없이, 역시 깔끔하게 생을 마감하면서, 아름다운 죽음을 소원치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목사님, 역시 전도사님이나 심방을 자주하시는 성도 분들의 경험이시겠지만, 고통이란 불청객은 죽음에 그림자처럼 달라붙는 거머리 같은 존재이다. 심지어 고통은 죽음으로 가시는 분들을 숨이 넘어 가기까지 괴롭히다 승리자처럼 사라져 버리는 가장 버거운 존재처럼 느껴진다. 한번 환자분들에게 고통이 역습할 땐 신앙의 힘도 이겨먹는 존재처럼, 생명이 끊어 질 때까지 가장 실존적인 존재처럼 가장(假裝)하고 괴롭힌다. 죽음도, 소망의 힘도, 평생을 견지했던 그 어떤 가치도 이겨 먹는 것처럼 사람을 괴롭힌다. 그러다 육신이란 존재의 끝을 보고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고통의 문제는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현실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그럼에도 고통의 한계란, 존재를 절대 넘어서지 못한다. 왜냐하면 고통이란 현상은 시간적 한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는 영원하다. 이것이 성도의 특권이며 죽음 앞에서도 평안의 지배아래 위로와 안식을 경험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 역사상 인간이 당하던 고통의 최 극치였다. 가장 극심한 고통, 더 나아가 육체를 넘어선 아버지와 단절이란 고통은 예수님조차 고통의 잔을 피해 가시길 원하셨다. 그럼에도 고통을 선택하신 분이다. 여기엔 인간을 위한 사랑과 고통의 한계를 잘 아셨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 말하진 않아도 고통은 주안에 있는 존재를 넘어서지 못함을 십자가에서 주님이 잘 보여 주셨다. 즉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새 생명 된 피조물을 이겨먹을 듯한 고통의 위협도 구원받아 변화된 정체성을 변개할 아무 능력이 없는 비실재가 고통이다. 그래서 수 없이 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고통과 고난의 길을 선택하고 평안한 안식으로 가신 예는 참으로 많다.

언젠가 말기 암 환자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직도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너무도 애석하지만, 육체의 현실은 너무도 냉혹하게 시간을 연장해 주지 않았다. 방문 중에도 검은 액체를 토해내고, 잠시라도 누울 수 없는 고통 속에 더 살고 싶어 그렇게 신앙에 의지한다. 그럼에도 고통이 주인 행색 하는 것처럼 권세를 부리는 것 같았다.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온 거인과도 같은 고통이 모든 것의 주인처럼 여길 만큼 고통이 실재처럼 횡포를 부린다. 이렇듯 고통이 가장 큰 실존처럼 느껴질 때 회의(懷疑)가 지배하고, 모든 가치와 의미를 삼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복음 안에 있는 인간 존재의 가치란 그 어떤 거인 같은 고통도 모래알만한 신기루 같음을 발견하고 감사드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진정한 웰 다잉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신자만이 갖는 특권임에 틀림없다. 단순히 고통 없는 정신적인 위안과 품위 있는 죽음, 자식들에게 신세 안지고 깔끔하게 죽어가면서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죽음 정도가 아니라 구원의 감격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신혼의 여행에 대한 기대에 찬 죽음이 진정한 웰 다잉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