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는 자신이 기르는 양에 대하여 전문가이다. 만약 자신이 기르는 양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면 그는 비전문가이며 선한 목자라 할 수 없으며 삯군 목자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필립 켈러」라는 분이 양 목장을 경영하면서 「양과 목자」란 책을 펴내 경건 서적계(書籍界)에 수십년간 베스트셀러 가 되고 있다. 초년 목회에 들어가는 후배들에게 이 책을 자주 선물하고는 한다. 이 책을 일독하게 되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양들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의하면 양의 시력은 3m앞도 잘 보지 못해서 스스로 길을 찾아가지 못하며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다고 한다.

또 양은 겉보기와는 달리 깨끗한 동물이 아닐 뿐 아니라 스스로 양식이나 물을 찾지 못하는 부족한 것이 많은 동물이란다. 양에 대한 문화적 인식에 차이가 있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좋게 말하고 있지만 중동지방에서는 생각이 모자라는 놈, 고집이 세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을 뜻하며 한국에서 가장 심한 욕이 ‘개새끼’라면 중동에서는 ‘양 같은 놈’이라고 한다.

이런 배경을 알고 보니 이사야 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갈 길로 갔거늘...”이란 말씀이 이해가 간다. 그래서 목자가 양을 안다고 할 때 그 앎은 그저 시시한 단편적 지식수준이 아니다. 목자가 양과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경험적 지식이 있어야 양들을 치고 먹이는 목자라이선스를 취득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날의 목자들은 양들에 대하여 무식한 점이 없지 않다. 실상 양들의 삶 속에 목자가 방관적이거나 심지어 냉소적인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지적 신앙이 팽배하여 양들에 대해 심정적 목회를 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때이기도 하다. 양은 방목하는 동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을 돌봄에 있어 목사가 그 삶들 속에 자의로든 타의로든 깊이 관여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목양을 한다고 할 수 없다. 어쩌자고 한 사람의 목자가 수천 수 만 명의 성도들을 목양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묻고 싶은 것이 많다.

“수많은 성도들을 자랑하는 그대여! 당신은 당신의 양들을 개별적으로 압니까?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 우는 그 한 사람을 압니까? 번듯이 차려입고 나가지만 갈 곳 없어 배회하는 그 양을 아십니까?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위험한 지경에 있는 그 양을 아는가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양이 온순해야 한다는 편견 때문에 목자의 눈에 조금만 벗어나면 가차 없이 도태시키지나 않습니까? 한 마리 고집 센 양이 길을 벗어나 제 갈 길로 갈 때 아! 그놈 잘 됐다 시원하다 하지나 않습니까? 또 양의 탈을 쓴 이리가 되어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녀도 짐짓 모른 체 하지나 않습니까? 왜요 그가 헌금을 많이 하는 까닭입니까? 그가 교회의 방패막이가 될 권력가여서 입니까? 화려한 연예인 생활과 신앙생활에 괴리 때문에 자살 일보 직전에 있어도 그저 그 양의 명성을 적당히 이용하는 그런 사이비 목자는 아닙니까? 도대체 당신이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나는 안다. 한 사람을 안다. 아니다. 두어 사람을 안다. 이 사람은 장애우를 돌보는 목사이다. 그가 라이드 주다 보면 별별 일들을 다 겪는데 한번은 뒤에서 갑자기 목을 졸라 핸들을 놓칠 뻔한 경험도 하게 되었다 한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맡겨 치고 먹이게 한 양들을 얼마나 잘 아는지 시험을 치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떤 유명한 목사요 교수인 분이 목회하는 교회의 에피소드이다. 그가 설교를 끝나고 문 앞에서 교우들과 악수를 하는데 그 교회의 오래된 집사에게 한다는 말이 “처음 뵙겠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이 집사가 “목사님 나 이교회에 몇 년 출석한 아무개 집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주일에도 똑 같은 실수를 범하였단다. 그래서 그 목사의 별명이 「아예 몰라!」「몰라 몰라!」 목사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