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임금이 살던 궁궐의 문 요즘 한참 희자되고 있는 덕수궁의 대한문이나 대갓집의 솟을 대문, 혹은 평민들의 평대문, 가난한 자의 사립문, 문이라고 할 수 없는 제주도의 정살문 등이다.

예전에 문이란 주거영역으로 출입하는 입구, 주거영역의 경계표시로 출입을 제한할 수 있는 입구로 화의 진입을 막고 복만을 들어오게 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사회의 발달로 신분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예전 서울에는 사대문(四大門)이 있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문안 사람이라 하고 밖에 사는 사람은 문밖 사람이라고 묘한 차별을 하였다. 심지어 미국 이민와서도 문안사람의 이상한 긍지를 가진 까탈스런 한 사람 덕에 고생깨나 하였다. 이제는 잊었지만 한동안은 북아현동에서 태어나 13번이나 이사를 다녔지만 한번도 문안에 살아 보지 못한 토종 문밖사람의 설움이 없지 않았다. 내가 다녔던 미동국민학교는 바로 서대문밖이었고 당시 제일로 치던 덕수국민학교는 게서 몇 블럭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버젓이 문안에 있어 뭇 어린아이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의 기능은 매우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들여보낼 것과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을 거르기 위함이다. 상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덕수궁 대한문 앞에 수문장이 지키는 것이나 버킹검궁전 문을 지키는 영국 곰털모자 기병대 등은 문의 기능을 잘 보여준다. 백악관을 들어 가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려면 가드포스트가 딸린 문을 몇 개씩 통과해야 한다.

일전에 알링톤에 있는 미국 수도 방위사령부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위병소 앞에 정지하였는데 검문이 끝난 후 문을 통과하려니까 지그 제그로 설치된 원통형 방어 포스트들이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문의 형태는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만이 환영받고 보호받고 대접받는다는 점이다. 밀입국자들이나 밀수를 하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문을 통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관문(關門)이라 할 인천 공항이 개항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세계 제일의 관문으로서 그 성가를 높이고 있다 한다. 이 관문을 통하여 들어오고 싶어 하는 동남 동북아의 가난한 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생명의 문인 셈이다.

“나는 양의 문이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아주 독특하고 새로운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다. 양의 우리는 도둑이나 맹수나 악천후로부터 양들을 보호하는 장소로 단 하나의 출입문이 있었다. 목자는 밤에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 문을 가로막은 채 잠을 잤다. 목자가 그렇게 문을 막아 지키고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목자는 곧 문이나 다름없다. 예수께서 내가 양의 문이다 라 하신 것은 양들의 생명을 지켜주시는 생명의 문이신 까닭이다. 사람은 평생을 문으로 드나들다 결국은 또 문으로 들어가야 된다. 양의 문안에 있는 자 곧 생명의 문 되신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천국 문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세상의 넓은 문을 좇아 유랑하던 자는 지옥문을 통과 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