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는 사람, 목회자의 중보자가 되어 성도와의 다리가 되어주는 사람, 바로 사모다. 본지는 애틀랜타 사모들의 간증과 함께 사모가 가져야 할 역할과 사명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 두번째로 콜럼버스장로교회(조영팔 목사) 조성은 사모를 만났다.

방년 25세,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와 젊은 나이에 시작한 사모 일이 부대꼈을 만도 한 데, 조성은 사모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 비결이 뭘까. “세상에 쉽기만 한 일이 어디 있을 까요. 가난하고 병이 걸리고, 사람간의 어려움이 있는 건 사람 사는 데면 어디서나 마찬가지죠.”라며 한껏 미소를 지어 보이는 조 사모는 감사할 것을 세며 산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품은 꿈,‘선교사’‘전도사’그리고‘사모’

누구나 그렇듯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부르심과 사연이 있다. 조 사모에게는 어떤 간증이 있을까.

어린 시절, 교회 부흥회며 사경회를 아침 저녁으로 좇아다녔고, 교회 첫 종이 울리면 놀 던 것도 멈추고 제일 먼저 교회로 달음질하던 조 사모는 주위 어른들께 ‘천상 사모 감’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5학년 때, 달력 겉 표지에 실린 선교사님 사진 중에 여자가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어머니에게 물었어요. ‘엄마, 여자도 선교사가 될 수 있어?’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그럼, 하나님께서 쓰시면 할 수 있지.’하고 대답하셨죠.”

12살 어린아이의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꿈은 처음엔 겨자씨처럼 작은 것이었다. 심겨진 씨앗은 자라나서, 조성은 사모가 대학을 들어갈 무렵에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있었다.

“연합고사를 보고 나서 원서를 쓸 때, 신학대를 가겠다고 말하는 저를 담임선생님이 깜짝 놀라 쳐다보셨어요. ‘너 정말이야?’라고 몇 번을 되 물으셨죠. 부모님도 그러셨어요. ‘너 정말이야?’라고…. 당시만 해도 여자 전도사라면 전형적인 까만 치마에 흰 저고리, 가난하고 고생한다는 생각이 강해서 장래희망으로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요.”


학부졸업과 함께 총신대 신대원에 입학했고, 졸업 1학기를 남겨두고, 남편 조영팔 목사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와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사모라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만족해요. 1학기를 남겨두고 졸업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라며 한쪽 눈을 찡그려 보이는 모습에서 조 사모 특유의 낙천적 성격이 여실히 엿보였다.

아이들 T셔츠도 제대로 못 사주지만, 감사하면…

인터뷰 내내 조 사모가 가장 많이 한 말은 바로 “사모로 사는 게 너무 자랑스러워요(Proud).”였다.

다양한 성격과 배경의 교인들을 돌보고 맞춰주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 마는, 사모로써 후회해 본 적은 없냐고 질문한 기자에게 그녀는 “사모 자체에 대한 후회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지난 세월에 이렇게 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만 남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전에 사모 세미나에 갔을 때, 사모여서 힘든 점을 이야기하라는 강사 분이 있었어요. ‘당장 돈이 없어도 꿀 수가 없다, 아파도 아무한테나 이야기 할 수 없다, 고부 간의 갈등이 있다’ 등 많은 이야기가 나왔어요. 모두가 공감하는 내용이었죠. 그런 다음 사모여서 감사한 것을 이야기하라는 질문에 제가 먼저 지목을 받아 일어났어요.”

그 때 조 사모는 다음의 두 가지를 감사의 조건으로 말했다. 첫째 자녀들이 다양한 사람(교인)들과 지내면서 관계와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어서 감사하고, 둘째 사모라서 마음대로 교회에 올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거였다.

“아이들 T셔츠도 제대로 사주지 못했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자녀들이 얻었어요. 힘든 것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속에서 감사할 것을 찾으면 셀 수 없죠.”

‘사모’라서 행복한 사모, ‘사모들’을 좋아하는 사모

마이애미에서 사역하던 20여년 전, 조 사모는 섬기던 교회에서 처음으로 성미(聖米)를 받았다. 한 집사가 밥을 할 때마다 쌀의 10분의 1을 모아 목회자에게 주는 성미가 든 갈색봉지를 받고 ‘정말 목회자 가정이구나’ 실감하며 기뻐했고,‘조 사모가 믿음의 어머니가 되게 해 달라’는 권사님의 기도에 뭉클하던 감동을 아직도 기억한다. “‘사모’라는 게 그저 좋다.”는 그녀.

조성은사모는 사모들을 좋아한다. 몇백병 사모들의 생일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그녀는 사모님들의 생일 때마다 꼬박꼬박 이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한다. 사모가 외롭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생일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생일을 기억하고 챙겨주는 것 만으로도 큰 힘이고 위로가 되잖아요. 큰 도시 교회나 대형교회 사모님들은 몰라도, 시골에 있는 교회거나 작은 교회이면 사모님들이 많이 적적하시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교회 홈페이지에 생일축하 메시지를 올리기도 해요. 교인들이 보고 같이 축하할 수 있도록 이요.”

“어려서부터 사모를 좋아해서, 직접 사모가 되어서도 다른 사모님들을 섬기는 일이 기쁘다.”는 조 사모. 올해로 결혼한 지 25주년, 사모가 된 지도 25주년인 조 사모는 감회가 새롭다며 이렇게 말했다.

“돌아보면 그 순간에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늘 ‘더 잘할 수 있었는데’하는 아쉬움에 마음이 무거워요. 하나님 은혜로 지금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앞으로 주의 일을 얼마나 더 할 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목사님을 섬기고, 성도를 섬기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사모의 역할을 묻자 조 사모는 “사모는 목사가 아니다. 사모는 목사이자 남편을 잘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목사님이 신경 쓰셔야 할 것은 말씀이고 기도이며 목양이다. 근본적 목회일(말씀, 기도)이 아닌 부차적인 교회 일은 가능하면 사모인 제가 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