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6시간 동안 열정적인 강의를 통해 칼빈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정성구 박사.
“우리는 흔히 요한 칼빈을 신학자와 강해설교자로서 날카롭고 냉정하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를 ‘목사’가 아닌 ‘선생’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세심하게 양을 돌보는 목회자였고,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했던 연속강해설교의 대가였습니다. 칼빈 탄생 500주년을 맞아 그를 새롭게 조명하는 시도가 계속되는 요즘, 뜨거운 영성을 소유했던 목회자, 구속사적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했던 강해설교자 칼빈을 다시 봐야 합니다.”

9일(화) 제일장로교회(서삼정 목사) 2050 비전센터에 모인 지역교회 목회자들과 리폼드신학대학원 한국어 목회학 박사과정(디렉터 김은수 박사, 이하 RTS)에 있는 학생들은 ‘칼빈 연구자’ 정성구 박사의 강의에 귀를 기울였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강의는 정오를 훌쩍 넘겨 계속됐지만 정 박사도 학생들도 모두 마음과 귀를 열고 ‘칼빈 새롭게 보기’에 전념했다.

김은수 박사의 초청으로 이뤄진 이번 강연은 ‘칼빈 탄생 500주년’에 맞춰 본국 기념대회와 시카고에서 열린 학술강좌 이후 애틀랜타 지역에서는 특별 강연 형태로 진행됐다. 타임지는 지난 3월 24일자 연례특집호에서 경제 위기 가운데 현재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 10대 사상 가운데 하나로 칼빈주의를 꼽을 만큼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다시 주목 받고 있다.

<개혁자 요한 칼빈-목회자와 설교자로서의 칼빈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강연한 정성구 박사의 강연을 요약, 발췌해 싣는다.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개혁교회의 교리적 기초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삶은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신학 골격을 세웠을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삶의 전 영역에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다. 특히 한 목회자로의 그의 설교와 실천적인 삶은 오늘 한국 교회의 모델과 귀감이 된다고 본다. 본 논고에서는 주로 칼빈의 목회적 사역 특히 그의 설교를 중심으로 생각고저 한다.

1. 목사 칼빈
요한 칼빈은 전형적인 목회자다. 그런데 칼빈은 신학자, 특히 조직신학자로서 너무나 강조된 나머지 그가 진실한 목회자라는데 대해서 별로 알려주지 않았다. 1936년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에서 목사로 임명받고 제네바 교회 곧 제네바 셍 삐에레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의 목회 사역은 예배 인도, 설교, 교육, 성례 집행, 행정 등 그의 일생은 목사로서의 삶이었다.

일생을 전투적인 삶을 살았던 칼빈에게는 많은 적이 있었다. 카톨릭 당국은 그를 눈에 가시처럼 여겼고,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도 이른바 리버틴이라는 자유주의자들도 칼빈의 적수였다. 특히, 본래 개혁노선에 있다가 카톨릭으로 복귀한 제롬 볼섹(Jerome Bolsec)이란 인물은 칼빈의 전기를 쓰면서 모든 더러운 욕을 다 썼고, 이후 역사가나 카톨릭은 이를 근거로 칼빈을 비판했다.

그는 심방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목사였다. 칼빈은 참 목자상과 개혁주의 목사의 전형을 남겼다. 그는 카톨릭의 미신적 미사 행위에서 말씀 중심의 예배로 개혁했다. 칼빈은 목사로서 따뜻한 마음으로 양들을 위해서 기도를 멈추지 않던 목사였다.

2. 사랑과 화해의 목사, 칼빈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으로 삼되 한 없이 동정심이 많고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목사였다. 그가 제네바교회에서 추방당해 스트라스벍으로 간 후 제네바교회는 칼빈의 지지자들 그룹, 기에르멩(Guillermins)이 뭉쳐져 후임자를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이에 칼빈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대들이 교회를 그토록 불행하게 흐트러뜨리고 또 거의 뒤집어 놓았던 그 사건이래, 우리 뒤를 이은 사역자들과 그대들 사이에 분쟁과 분규에 대해 듣는 것보다 나를 슬프게 하지 않습니다. …그대들은 기독교인으로서 행동하라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그대들에게 해야 할 것보다는 그대들이 다른 이들에게 해야 할 것에 우선 몰두 하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화해’라는 표현을 여러 번 썼고, 하나님의 교회의 화평과 성도들과의 화해, 신임목사와의 화해를 우선시했다.

3. 심방과 상담을 잘한 칼빈
1538년 칼빈이 바젤에 머물고 있을 때 파렐의 조카가 페스트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한다. 당시 페스트는 곧 죽음을 의미하던 시대로, 전염병이므로 격리시켜야 했다. 그러나 칼빈은 위험을 무릅쓰고 목사로서 성도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달려가 복음과 위로의 기도를 전했다. 끝내 그가 숨을 거두자 칼빈 목사는 그의 장례비를 부담했고 그 자녀들을 전적으로 돌봐주었다.

그 당시는 심방이니 상담이란 말 조차 없던 시대에 칼빈은 마틴 부처(Martin Butzer)의 권면으로 심방의 귀중함을 알았고 실행했다. 그는 자기 교회 노인들의 기호품까지 일일이 꿰고 있을 정도로 목사로서 섬세하게 양들을 돌봤다.

4. 설교자 칼빈
교회사에 가장 걸출한 강해 설교자는 요한 칼빈이었다.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깨달았을 뿐 아니라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면서 삶의 현장에 적용했던 강해설교의 왕이다. 그가 목회자로서 얼마나 영성이 대단했는지 욥기서 설교는 159편, 신명기는 200편에 걸쳐 강해를 할 정도였다. 그의 설교는 인기 있는 설교도 아니고 대중을 선도하는 설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성경의 본 뜻을 정확히 주해하고 그것을 적용시켰다.

그는 주일 아침과 오후, 평일에는 월, 수, 금요일에 설교했다. 또한 연속적 강해설교로 주일 오전에는 신약을 오후에는 시편을, 월, 수, 금에는 구약을 강해했다. 부활절에서 10월 초까지는 아침 6-7시, 겨울에는 7-8시에 모였다. 우리는 신학자, 주석가로서의 칼빈 못지 않게 설교자로서 칼빈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5. 강해 설교의 왕 칼빈
칼빈은 뛰어난 암기력으로 성경연구와 신학연구를 한 뒤 성경만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서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강해설교를 했다. 1년에 286회 설교에 186회 신학강좌를 담당했다. 교회사 학자 워커(W. Walker)에 의하면 그의 설교는 간단 명료하고 단순하고 직접적이었다. 잠은 거의 없었고 장시간 성경연구에 몰두했다.

칼빈은 목사로서 또는 교수로서 강단에서 몇 달간 매일 말씀을 증거하기도 했고, 때로는 몇 주간씩 하루에 두 번 설교하기도 했다. 그는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항상 실제적으로 적용하여 신앙에 유익이 되고 결단하도록 했다.

6. 이상적인 목사상을 세운 칼빈
칼빈은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명인데, 영웅주의나 허영에 빠진다면 그리스도의 교회에 장애물이 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특히 그는 목사를 부패하게 하고 타락하게 하는 것이 바로 야망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세운 참 목자상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 둘째, 기도의 사람, 셋째 다른 사역자들과의 화합이다.

7. 목회의 원리를 제시한 칼빈
신학자, 성경 주석가, 종교 개혁가, 교회 조직가로서 칼빈의 모든 사상은 실제로 그의 목회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의 목회원리를 보면 그의 신학의 핵심을 알 수 있고 그의 목회 철학을 보면 그의 삶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있어 목회란 영혼ㅇ르 돌보는 일이었다. 그의 목회원리는 첫째 말씀의 순수한 전파, 둘째 성례를 강조, 셋째 권징과 훈련 마지막은 교육, 다섯째 예배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