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에 미국 땅을 밟은 다수의 한인들이 이국 땅에 정착하여 터전을 잡아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인들은 언어적인 장애와 함께 한국에서의 학력이나 경력이 이 사회에서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전문 분야를 살려 전문직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자신의 전문 분야를 포기한 한인들은 기존의 작은 업체를 인수하여 경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흑인 동네에서 식품점이나 슈퍼마켓, 보석장신구상, 의류상 등을 경영하는 한인들의 비율이 대단히 높았다. 그런데 이러한 상점은 권총을 소지한 강도의 침입을 받기 쉬운 우범 지역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애틀랜타에서도 한인들이 경영하는 상점에 강도가 들어 금품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인명의 희생을 발생시키는 경우가 흔히 일어났다. 한인 사업체들이 많아지자 한인들의 희생이 더욱 늘어났다.

이와 같이 한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여 터전을 잡아 나가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여야 하는 것이었다. 한인 후세들은 이러한 초기 한인 1세들의 피땀 어린 노고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애틀랜타 한인회 한인 이민사 편찬위원회는 이렇게 희생된 한인들은 서부 개척 시대에 미국 서부에서 인디언들에 의해 희생된 개척자들과 유사한 것이라고 보았고, 희생된 한인들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역사에 남겨 두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 하였다.

그러나 애틀랜타와 그 부근에서 희생된 한인의 수는 엄청난 것이지만, 그것을 정확히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은 자료 수집상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러한 작업은 차후로 미뤄두고 여기서는 몇 가지 사례만을 남겨두려고 한다.

애틀랜타 지역에서 한인이 희생된 첫 케이스로 알려진 사건은 강여인(강계찬 어거스타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 부인) 피살 사건이었다. 강계찬 목사 부부는 고교생인 두 딸과 함께 1975년 10월 경 시카고에서 애틀랜타로 이주해 왔다. 강 목사는 애틀랜타 모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못해 1976년 1월10일 경 다시 시카고로 돌아가려고 이삿짐을 다 싸놓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 강씨는 전부터 얼마간 클레어몬트 선상(현재 골든 부다 옆)에 있는 매직 마켓에서 부매니저겸 캐셔로 일해 오던 중 1975년 12월26일 낮 12시 경 복면을 한 백인 괴한이 마켓 안으로 뛰어들어 강여인을 무조건 화장실로 끌고 들어가 38구경 권총으로 머리와 가슴을 쏘아 현장에서 숨지게 한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는 계획된 무장 강도의 소행으로 악랄하고 무자비한 수법으로 죄없는 한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었다.

시카고로 다시 이사가려던 강계찬 목사는 갑작스런 이 사건으로 부인을 잃고 두 딸과 함께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당시 처음 개관한 애틀랜타 총영사관의 오명호 총영사와 박건우 영사(후에 주미대사)의 도움으로 디카투어에 위치한 터너 장의사에서 장례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