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미 동남부 최초의 한식 전문 음식점 코리아하우스(Korea House)

애틀랜타에 한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한인들이 운영하는 전문 업소들이 개점을 하게 되었고, 한국 음식점도 등장하게 되었다. 음식이란 특정 국가나 민족의 대표적인 문화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 음식점을 소개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본다.

특히 미국은 다민족 국가이며 또한 외식 문화가 생활화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 음식점이 한인들에게 주는 의미는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초기 한인 이민사회에서 한인들이 운영하던 한국 음식점이 개별 가구의 생계 해결 수단이나 방편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러한 업소가 한인 사회에 주는 의미는 상당히 클 수 있었다. 애틀랜타에서 최초로 개점한 한식 전문점 코리아하우스가 애틀랜타 한인 사회나 미 주류 사회에 끼친 영향은 상당히 컸기 때문에 여기에 소개한다.

1977년 오영택 씨가 ‘징기스칸’이란 이름의 식당을 지금의 Midtown 지역, Peachtree St.와 6th Street 사이에 개점하였다. 당시 2천 내지 3천 명으로 추산하던 애틀랜타 한인 사회에서 하나의 한식 전문 음식점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영택 씨는 한식과 중국식을 겸한 음식점으로서 좌석 30여 석을 구비한 작은 규모의 음식점을 유지하였다. 1978년 10월 은호기 씨(현 다니엘기도원 원장, 연합장로교회 은퇴장로)가 징기스칸을 인수하여 코리아하우스(Korea House)로 상호를 변경하여 운영하였다.

코리아하우스는 이 지역 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미국 주류 사회에도 널리 알려져, 한국 음식 문화를 널리 소개하면서 성업을 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식이나 일식은 오래 전부터 미국 사회에 알려져 있었으나, 한식에 대한 이해나 경험은 미국 사회에서는 거의 전무하였다.

단지 주한 미군 출신의 미국인들이나 사업상 한국을 왕래하던 소수 사업가들 사이에서만 한국 음식이 다소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가운데 은호기 씨 가족은 어느 초기 이민자들이 겪어온 것처럼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코리아하우스를 운영하며 이 지역 사회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당시 소수의 한인 거주자들을 상대로 해서는 사업의 승산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인을 주고객으로 하여 식당의 실내 분위기를 개선하고 또한 미국인의 구미에 맞도록 음식을 개발하여 고객을 유치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한식의 독특한 멋을 점차 널리 알리게 되었다. 당시 은호기 씨 가족은 한국 음식점으로 성공한 비법을 묻는 질문에 “손님 한 분 한 분을 내 가정에 초대한 듯 정성껏 모시는 데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코리아 하우스가 미 주류 언론 기관(TV 방송국들과 신문)에서 특별 소개되면서 좌석 30여 석에 불과하던 코리아하우스는 어느 날 갑자기 타운 내 유명식당이 되어 주말에는 노란 머리, 코 큰 사람들이 자리를 기다리며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시 CNN방송 회장 테드 터너(Ted Turner)나 에모리 대학 총장 레이니 박사(Dr. Laney: 전 주한 미국대사), 김대중 씨 등의 유명인사들도 개인적으로 혹은 가족을 동반하여 코리아하우스를 찾아와서 즐겁게 한식을 즐기곤 하였다.

아울러 코리아하우스는 애틀랜타에 살고 있는 한인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사랑방 구실을 하며 초기 이민자들의 외로움과 어려움을 서로 격려하는 장소 구실을 하였다. 다시 말해, 코리아하우스는 각 가정에서 준비하기 어려웠던 음식들을 즐기며 이민자의 애환을 달래는 장소가 되었다. 심지어 다른 주에서도 몇 시간 씩 운전하여 와서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식이 싫어 햄버거를 따로 싸 들고 부모님의 손을 잡고 따라왔던 어린애들이 성장하여 다시 와서는 육개장, 김치찌개, 손두부 등을 가리지 않고 즐기는 경우가 있었다고 은호기 장로는 당시를 회상한다.

1982년 2월 18일 새벽 코리아하우스에 화재가 발생하여 식당이 전소되었다. 당시 AJC 신문과 이 지역 TV 방송에 코리아하우스 화재소식을 보도하면서 ‘코리아 하우스는 이 지역 유일의 한국 음식점으로 이민 1세가 이룩한 사업체의 의미를 넘어서 이 지역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장소이기 때문에 온 가족이 합심하여 불사조의 모습으로 우뚝 설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의 격려에 힘입어 아픔을 딛고 잿더미에서 솟아오르는 불사조같이 코리아하우스는 재건되었다. 좌석 200여석 규모로 증축, 같은 해 8월 16일 문을 다시 열어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리고 코리아하우스는 1988년 12월 31일자로 만 10년의 영업을 마감하였다. 이것은 한인사회의 팽창과 시대 조류의 변화, 외곽 지역에 새로이 형성되는 한인 상업 지역에 개점한 한국 음식점들의 영향, 코리아하우스 업주의 새로운 사업 계획 등에 기인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