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결정난 단성론자들은 동방교회들이었습니다. 아르메니아, 이집트, 에디오피아, 그리고 시리아에 있었던 교회들은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 즉 '그리스도의 한 인성 안에 두 본성이 연합되어 있다'는 그리스도의 신인양성론을 거부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반 칼케돈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중심으로한 단성론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 중 이집트의 토착 교회를 콥트교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콥트라는 용어는 고대 이집트어에서 유래하며 여러 차례 변화를 거쳤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도시인 멤피스는 ‘히크프타’ 라고도 하였는데, 이집트에 이주한 그리스인들은 이를 ‘아이깁토스(Aigyptos)’라고 하여 그리스화하였습니다.

그 후 이 이름은 전체 이집트를 지칭하게 되었는데 오늘날의 이집트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어서 이 명사의 형용사로서 ‘아이깁티오스’(Aigyptios)가 생겨나, 이것이 이집트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640년 이집트를 정복한 아라비아인들은 이것을 아랍화하여 킵트(Qibt)라고 하였으며, 점차 이집트인의 이슬람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슬람화하지 않은 이집트인, 즉 토착 콥트교를 계속 믿는 이집트인만을 킵트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이 호칭이 유럽으로 건너가 콥트라는 말로 변하였고, 이것이 세계에 유포되었던 것입니다. 이집트의 콥트교회의 역사는 오래 되어 1세기 중엽의 마가의 이집트 선교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윽고 콥트교회는 독자적인 단성론 교리를 발전시켰으며,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결정되자, 그때부터 고립의 길을 걸었습니다.

다만 나일강 유역에서는 세력을 넓혀 이집트 남쪽 지역인 누비아는 6세기에 콥트교화하였으며, 그 유적은 1960년대 누비아유적을 발굴할 때 화려하게 되살아났습니다. 콥트교도는 민족적으로 고대 이집트인의 직계이며 그들의 언어도 역시 고대 이집트어의 직계입니다.

고대 이집트어는 자음만을 문자로 표기하고 있었으므로 콥트교도는 모든 음을 문자로 표기한다는 생각에서 독자적인 알파벳을 만들고 몇 가지 문자는 그리스문자에서 차용하였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3세기에 콥트어 및 콥트문자가 성립하였으며 구약성경과 신약의 복음서가 콥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후 아라비아인의 정복과 함께 콥트어는 쇠퇴하여, 16세기에는 일상생활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콥트교에 의해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도원은 통상적으로는 3세기 후반에 중부 이집트의 테베에서 은자 바울과 안토니우스에 의하여 창설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가 쓴 ‘안토니우스의 생애(356년 이후)’가 일찍부터 서유럽에 전해져 수도원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막이나 산 속에서 혼자 수행하였습니다. 안토니우스와 거의 같은 시대에 똑같이 이집트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파코미우스는 단독생활에 따르는 일상적인 불편과 정신적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높은 벽을 두른 부지 안에 몇 개의 건물이 있고, 각 건물에 20~40명의 수도사가 한 사람의 지도자와 함께 기거합니다. 식사와 기도는 공동으로 하고 복장도 동일합니다. 공동생활 때문에 청빈과 복종의 덕목이 중시되었으며, 노동의 의무는 특히 강조되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수도사들이 자활하기 위해서이며, 그들은 농경 외에 나일강에서 나는 골풀로 광주리를 엮고, 종려나무로 세공물을 만들어서 팔기도 했습니다. 파코미우스가 콥트어로 쓴 수도규정은 일찍부터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번역되어 널리 유포되었으며, 공동생활양식의 수도원은 그의 제자 에우게니우스에 의하여 멀리 메소포타미아에까지 전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