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각을 다투며 바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아버지의 역할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인생의 전반전을 성공과 과업달성을 위해 달려왔다면 후반전을 앞둔 휴식시간 ‘아버지학교’에 참여해보는 것은 어떨까.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좋은 남편’ ‘자상한 아버지’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주변에 변화된 아버지들이 오늘도 ‘주님 제가 아버지입니다!’를 외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을 만나 변화된 삶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릴레이 인터뷰 마지막은 정창용 형제다. 아내의 끈질긴 권유에도 “내가 아버지학교 교수로 가면 갔지 학생은 싫다”고 버티던 그는 다른 형제들이 사업장을 찾아와 가겠다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일을 못하게 할 정도로 ‘섭외대상 1순위’ 였다. 어쩔 수 없이 ‘가겠다’는 대답으로 형제들을 돌려보내고, 아버지학교 당일 마음이 열리지 않아 2시에 나섰지만 시작 시간을 넘긴 6시에야 ‘이왕 나온 거 가보기나 하고 결정하자’는 생각에 발을 들여 놓게 됐다고 한다.

“저는 아버지께서 어려서 돌아가셔서 한번도 제대로 불러본 적도 없고, 모습도 정확히 기억이 안 날 정도에요. 첫날 강의에 ‘아버지의 대물림’을 듣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족 중 막내로 태어나 형님들이 다 이야기해주지 않은 아버지의 부정적인 모습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습됐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30대 중반까지 사업한다고 해외 다니면서 한번 나가면 집에 연락도 안하고 마음대로 살다가 큰 문제를 만났어요. 고민하다가 아버지도 젊은 시절 월남 등지를 다니시면서 사온 기념품들이 집에 즐비했던 게 생각났죠. 어느 순간 뭔가로 얻어맞은 듯 아버지의 과거와 정확히 일치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정 형제는 아버지학교에서 비로서 ‘세습되는 죄악’을 끊어야 한다는 결단을 하게 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의 부정적인 영향력이 들어왔듯, 비록 할아버지를 모르는 자녀들이지만 아버지인 자신을 통해 그 영향력이 세어 들어갈까 염려가 됐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많았기 때문일까. 그가 11기 조장으로 봉사할 때 비슷한 형제를 만나게 됐다. 유독 아버지에 대한 편지쓰기를 끝까지 거부하던 형제는 정창용 형제의 간증을 듣고 절절한 마음을 담은 편지 2장을 아버지께 읽어드렸다. ‘아무리 원망스럽다 할지라도 살아계실 때 아버지를 부를 수 있으니 행복한 것’이라는 정 형제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아버지학교를 통해 가장 크게 변화된 점을 묻자 그는 본인 스스로 끊을 수 없었던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변화되어 간다고 기뻐했다. 또 가부장적으로 대하던 태도를 바꾸자 자녀들도 밝아졌고, 섬김을 실천하면서 사업체 직원들과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게 되어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직선적인 성격과 방만한 생활로 많은 상처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품어주고 기다려준 아내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간지러운 표현은 잘 못하지만, 명령조의 말투가 권유형으로 바뀌고 아내의 차도 먼저 세차해주는 작은 배려가 생긴 것.

“나로 인해 발생한 사람들(가족) 때문이라도 아버지학교는 꼭 가야 합니다. 몸만 가세요. 교과서에도 배우지 못했던 ‘아버지’라는 걸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가 정립이 안되면 주변 사람 모두가 힘들 수 밖에 없잖아요. 저는 자꾸 넘어지려고 갑니다. 아버지의 눈물과 어머니의 눈물은 다릅니다. 아버지들이 와서 마음껏 눈물 흘릴 수 있는 곳, 아버지학교에 꼭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