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년경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 태어나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었던 아리우스(Arius)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의 주장을 따르는 사상을 아리우스주의(Arianism) 라고 부릅니다. 아리우스주의란 그리스도가 피조되고 유한한 본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사상으로 초대 교회의 정통교리에 도전하는 주요이단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아리우스는 당시 플라티노스에 의해 만들어져 크게 유행하던 그리스의 철학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의 주장을 가르침으로써 많은 추종자를 얻었습니다.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는 신성의 절대적 단일성만이 최고의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자를 반신으로 전락시켰으며, 성자만이 인간과 하나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구속 개념을 훼손하였다고 반박하였습니다.

325년에 지금의 터어키지역에 있는 니케아에서 모인 공의회, 즉 교회들의 총회에서는 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 후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aea)에서 정죄된 아리우스파의 확산을 막고 정통 신앙을 지켜낸 황제로 알려져 있는 데오도시우스는 381년에 초대 공의회 중 두 번째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일차 공의회인 니케아 회의가 채택한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 하여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는 유럽의 고트족(Goth)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아리우스주의로 개종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트족이 로마의 속주로 들어온지 거의 30년 후에 거대한 무리의 서고트족이 도나우를 넘어 이동해 왔고 유럽의 지형을 크게 바꾸게 됩니다. 고트족은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로마 제국을 수백 년간 괴롭혔습니다.

6세기 중엽 고트족의 역사가 요르다네스가 기록한 전설에 따르면, 고트족은 원래 스칸디나비아 남부에 살던 부족으로 베리그 왕을 따라 3척의 배를 타고 발트 해 남쪽 해안으로 건너가 그곳에 살던 반달족(Vandal)과 다른 게르만족을 물리치고 정착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당시 고트족의 특징이 둥근 방패와 짧은 칼, 그리고 왕에 대한 복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르다네스는 또 그후 고트족이 필리메르 왕을 따라 비수아강 지역에서 남쪽으로 이주했으며, 온갖 모험을 겪은 뒤 흑해에 다다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트족의 이러한 이동은 2세기 후반에 일어났으며, 그로인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통치하던(161~180) 로마제국의 도나우 강 쪽 국경을 게르만 일족이 강하게 압박하게 됩니다.

고트족은 3세기에 끊임없이 로마 제국의 소아시아 지방과 발칸 반도를 침략했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다스리던 시기(270~275)에는 로마인들도 도나우 강 건너편의 다키아 즉 오늘날의 루마니아지방을 고트족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후 도나우 강과 드네스트르 강 사이에서 살던 고트족을 서고트족,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살던 고트족을 동고트족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고트족은 다른 게르만족보다 더 진보된 정치적 조직을 발전시켜, 왕을 정점으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4세기경에는 로마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서로 적대하던 시기도 있었으나, 평화의 시기에는 문화적인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고트족의 귀족들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고트족 사람들은 로마의 도로망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4세기 중엽 고트족의 개종이 시작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거의 모든 고트족이 아리우스파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