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과에서는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 그리고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기독교국교화(380년) 등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제국을 둘러싼 주변의 정치적 상황도 다루었습니다.

당시 이단인 아리우스의 주장과 그것을 다룬 최초의 기독교 총회라고 불리는 니케아 공회(325년)가 모였습니다. 그 공회에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회의 신앙고백을 정한 니케아 신조를 결정하였습니다. 본과에서는 우리의 눈을 동쪽으로 돌려서 이런 기독교의 사건들이 있을 당시 중국과 한반도를 위시한 여러 지역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그 시대의 중국을 살펴봅시다.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나라가 세워지고 중국 최초의 황제 칭호를 사용하며 나라를 세운 진나라의 시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의 시황제가 죽자 그 제국은 쉽게 무너지면서 새로운 제국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항우와 유방의 이야기로도 유명한 이들이 바로 이 시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항우와 유방 중에 결국 항우가 죽고 유방이 천하를 지배하게 되면서 새로운 제국인 ‘한(Han)’이 세워졌습니다. 그때가 B.C. 202년입니다. 그 후 한 제국이 한 때 망하고 ‘신’제국(Xin)이 등장하였다가 A.D.25년에 다시 한나라가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세워진 한나라를 역사에서 후한이라고 부르며 후한의 첫 황제가 광무제입니다.

후한제국은 다시 220년에 무너지고 그 유명한 삼국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소설 <삼국시대>는 본래 <삼국지연의>라는 이름입니다. 그 소설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진 조조에 의해 세워진 위나라(Wei)와 손권의 오나라(Wu)와 유비의 촉나라(Shu)가 바로 그 삼국입니다.

그리고 265년에 위나라에 의해 진나라가 세워지고 280년에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지만 설립자인 무제가 죽자 무능한 아들 ‘헤제’가 즉위하면서 나라가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그는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그럼 고기죽을 먹으면 되지’라고 투덜거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결국 그 나라는 316년에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넓은 영토를 지배하던 흉노족에 의해 망하였습니다.

흉노는 정착된 농경생활을 하던 중국인들과 달리 유목생활을 하는 기마민족이었습니다. 이때에 중국인들은 흉노족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특히 북부 중국은 승마가 활발하게 행해지면서 편리한 통소매의 상의와 승마에 편한 바지와 허리띠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인들은 변방의 사람들을 야만인이라는 의미로 오랑캐로 불렀으며 북방인들을 ‘호’라는 말로 칭하였는 데 호두나 후추 등이 북쪽의 흉노에 의해 전해진 것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수력 방앗간이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만두와 국수류, 그리고 치즈나 요구르트도 유행하였고 두부도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닥에 앉은 생활양식이 의자생활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앞서 언급한 진나라는 망하고 317년에 ‘동진’으로 불리는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나중에 앞의 진나라를 서진으로 불러 서진과 동진으로 구별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400년 동안 한반도에 거점을 두고 있던 중국 한족인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게 패하여 한반도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313년의 일입니다.

지난 글에서 다룬 것처럼 313년은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때입니다. 한반도에 이미 세워져 있던 고구려와 백제에는 4세기 후반에 불교가 전래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391년에 왕으로 역사에 등장하였습니다.

당시 인도에는 320년에 굽타왕국이 세워졌습니다. 인도 반도의 북부에 세워진 이 왕국은 챤트라굽타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로서 문학과 미술, 건축, 그리고 수학 등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당시에 산스크리트 문학이 꽃을 피웠는 데 ‘사쿤탈라’라는 희곡은 지금까지도 남아서 세계에 소개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라비아 숫자도 본래 인도에서 탄생되어서 아라비아로 전해졌으며, 그것이 유럽으로 그리고 세계로 알려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