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갑 교수
콜롬비아 신학대학원에서 예배학 교수와 한미목회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는 허정갑 교수의 예배탐방 이야기를 싣는다. 미국교회를 중심으로 예배의 모습을 때로는 진솔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전달하는 필자의 시각을 존중해 되도록 본문 그대로 싣는다. 탐방한 교회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예배 모습 전달에 초점을 맞추고자 편집을 최소한으로 했다. 아래 글에 대한 모든 저작권은 한미목회연구소(www.webkam.org)에 있다. -편집자 주-

한국교회에는 연말과 새해가 교차하는 신년영시예배가 1년을 시작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인 것처럼 희랍(Greek)문화에는 부활절을 시작하는 파스카 주일 영시예배가 1년 중 가장 중요한 예배이다. 동방교회는 우리와 다른 달력을 사용하는지라 부활절이 조금 늦다. 금년은 1주일 늦게 부활절을 맞는다. 부활절 영시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인 회중이 밤11시가 되자 300석의 본당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오늘만큼은 늦게 오면 자리가 없기에 일찌감치 교회로 모인 사람들은 들어오면서 입구에서 기도의 초를 밝히고 이콘에 고개 숙여 입을 맞춘다. 본당 바닥에는 오전시간에 드린 예배에서 어린이들이 뿌린 나무 잎사귀들이 음부에서 죽음을 깨뜨린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흩어져있다.

검은색 로브와 모자, 그리고 긴 수염을 기른 성직자가 나와서 제단의 닫힌 문을 향해 기도를 시작한다. 제단 칸막이에 그려진 이콘들에 하나씩 입 맞추며 희랍어로 기도하고 제단 문을 열고 예배준비를 한다. 12시 정시에 촛불을 밝히고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기 위하여 모인 오늘의 예배이다.

▲ⓒ한미목회연구소
이곳에서는 희랍에서 이민 온 사람들 외에 희랍인과 결혼하여 개종한 가톨릭, 성공회 교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로부터 예배에 대한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 정작 희랍사람들은 무뚝뚝하고 말을 안 붙여 주는데 희랍문화의 이방인 경험이 있는 이 사람들은 나와 같은 동양인 방문자에게 친절히 다가오며 자기 옆에 앉아서 궁금한 점을 물어보라고 챙겨준다. 무엇이 정교회 예배의 특색인가? 이들에게 질문하니 ‘예전의 신비’가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한다. 무엇이라 설명될 수 없는 신비의 파스카, 부활철야 예배의 진행되는 순서를 다 이해할 수 도 없고 한 번의 방문으로 기록할 수도 없다. 그러나 보고 느낀 대로 기술하기를 다짐하며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바짝 뜨고 제단을 바라보았다.

정교회 신부들은 결혼을 허락한다. 그러나 결혼한 신부는 주교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주임신부의 아들이라는 이를 중심으로 구성된 평신도 세 사람이 기도문을 노래하며 예배를 안내한다. 희랍어와 영어를 번갈아 노래하며 악기반주 없는 무반주 찬트를 진행하는데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노래가 불리어지는 긴 시간동안 그냥 서 있다. 3시간이 넘게 진행되는 이 정교회예배에는 의자 없이 서서 예배드림이 이들의 오랜 역사적 전통이기도 하다.

동방정교회에는 볼거리가 많다. 이콘과 유리화, 그리고 여러 장식품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성가대석에서 노래가 불리어지는 동안 성인들의 이콘이 그려진 벽 안의 제단에서는 신부와 교인들이 부활절 금색 옷으로 갈아입고 제단을 꾸민다. 성가대가 입장하는데 놀랍게도 지휘자는 여성이다. 정교회에서는 여성이 제단구역에 들어갈 수 없기에 제단 안에 있는 신부가 칸막이 문밖으로 나와서 성가대 지휘자와 예배를 의논하고 있다.

한국의 정교회보다 더 개방적인 미국정교회의 모습을 본다. 서울 마포에 위치한 성니콜라스 정교회를 방문한 경험으로는 예배에 참석하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는데 미국의 정교회는 자유롭고 방문자에게 따뜻한 배려를 베푸는 모습이 보기 좋다. 사실 한국에서는 정교회에 대한 호기심에 수많은 개신교 학생들이 예배탐방을 목적으로 한꺼번에 방문하여 민폐를 끼친 것이 그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기에 예배를 참석하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는데 미국에 와서 정교회방문을 하여 드디어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어 더 좋았던 것 같다.

오늘은 헌금을 두 번 걷는다고 한다. 부활을 선포하고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늦게 오는 사람들 모두 참여하기를 위하여 두 번 헌금접시를 돌린다고 옆에 있는 사람이 알려준다. 12시 15분전에는 이미 자리가 다 차고 늦게 온 사람들은 손에 양초를 들고 서서 예배를 드린다. 10시 30분부터 일찍 와서 앞자리에 앉았기에 가능한 오늘의 예배탐방이다.

신부는 편지를 낭독하기 시작한다. 정교회의 대표로서 교황격인 대주교(Patriarch)로부터 온 편지이다. 편지의 내용은 신의 죽음을 선포한 서양철학자(니체)를 언급하며 동방신학의 예전은 부활신앙으로서 죽음에서 다시 사신 하나님의 아들, 신이며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기신 부활을 선포함에 있다. 빈 무덤은 하나님의 죽음이 그냥 죽음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승리로 이기심을 강조하며 그의 영원하심을 축하한다. 현대사회의 두려움과 소망이 없는 곳에 부활의 희망을 전하며 편지는 미국정교회 교인들에게 인사를 전하며 파스카 2009년의 기쁜 소식, 즉 잔치중의 잔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선포한다.

▲ⓒ한미목회연구소
부활의 소식은 세상에 선포하여야 하는 사명을 말하며 부활예식의 시작으로서 성전의 모든 불을 끄는 작업을 한다. 12시 정각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천사의 선포와 함께 깜깜한 암흑 속에서 회중은 고요히 침묵을 지킨다. 곧 신부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불을 제단 안에서 밝히고 제단 밖으로 들고 나와 회중의 손에 쥐어진 양초에 불을 붙인다. 순식간에 초의 불이 확대되며 성전 안이 촛불로 환하게 밝아진다. 불을 밝히는 찬송과 함께 이콘, 십자가, 성경, 어린이, 성가대의 순서로 회중은 앞자리에서부터 밖을 향하여 퇴장한다. 부활의 찬송을 회중은 신부와 함께 메기고 받으며 진행하는데 신부와 성가대가 성전 밖을 나간 후에는 찬송이 잠시 끊어지는데 이는 희랍어와 그 예전을 잘 모르는 회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그 찬송의 행렬에 이어지질 않고 있음이다.

교회 앞마당 주차장에서 펼치는 파스카 예전을 위하여 길거리로 나온 것이다. 파스카는 유대인들의 유월절에서 비롯된 기독교 용어로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함께 일컫는다. 우리는 흔히 고난과 부활을 따로 구분하여 예배드리고 부활절이 주일이 지나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물론이고 부활의 의미마저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기에 파스카(pascha)란 단어는 목자도 되시고 또한 어린양도 되시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리킴과 같이 고난과 부활을 함께 의미하는 귀한 용어이다. 부활절이 하루의 부활 주일이 아니라 오순절이 있기까지의 50일 절기로서 계속 부활신앙을 이야기함에 파스카의 개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임신부의 집례는 기도로서 부활선포의 예전에 마침을 갖는다. 세계평화와 교회를 위하여, 목회자, 정치인들, 군인, 도시의 위정자, 날씨와 추수의 열매, 갇힌 자, 여행자….. 계속되는 리스트에 회중은 키리에 엘레이손으로 화답하며 기도를 노래한다. 그리고 본당으로 다시 향하는데 시계를 보니 0시 30분이다. 앞으로 2시간이 넘게 부활 주일 첫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그 순서는 매 주일 예배와 동일하다. 더 있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이른 아침 인근에 위치한 콜롬비아 한인연합장로교회(South Carolina) 주일예배 설교를 전하여야 하기에 호텔숙소로 돌아왔다. 희랍정교회 부활철야 예전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