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이 그 부인을 우리 집이라 불렀다 해서 새삼 아내에 대한 호칭이 세간에 입방아거리가 되었다. 말하자면 우리 집 사람이나 우리 집 식구란 뜻이겠는데, 우리 집 부엌데기니 솥 뚜겅 운전사니하는 비하보다는 젊잖은 표현이지만 사실 우리말에 부인을 두고 아내란 말 보다 더 좋은 호칭은 없다.

우리는 발음대로 "아내"로 표기하나 북한에서는 그대로 "안해"라 쓴다. 아내는 "안"과 "해"가 결합한 낱말이며, "집 안의 해"라는 좋은 뜻을 갖고 있다. 목사의 아내를 높여 성도들이 목사(牧師)의 스승 사(師)자를 떼어 내어 사모님이라 부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잘못된 적용이다. 곧 스승의 어머니란 말인데 이를 목사의 부인에게뿐 아니라 모든 상사의 부인에게 생각없이 호칭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오늘날 목사의 부인을 사모라 함은 목사가 하나의 직분이듯 사모도 직분화한 직명(職名)이 되어 버려 목사나 목사부인 스스로 사모라고 말하니 민망한 일이다. 성도들이 불러 주는 것이야 감사한 일이나 본인은 누구의 아내라 또는 제 아내라 겸양함이 마땅한 일이고 언어순화의 모범을 보이는 일일 것이다.

각설하고 집안의 해와 같은 아내를 둔 자는 마땅히 복된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 있는 동안 애련가를 불러 마땅할 것이다. 성경에 애련가는 단연코 잠언 31장 10절 이하에 등장하는 현숙한 여인이며,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 시128편 3절의 내실에 있는 아내이며(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아가서 전체에 등장하는 사랑스런 여인이다.

하수영이란 가수가 불러 국민 애창곡이 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가 있다. “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로 시작되는 애련가는 모든 남편들을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한 애절함이 담겨 있다. 추운 겨울 시린 손끝을 호호불며 빨래하며, 적삼에 송글송글 땀방울 맺히는 한 여름 뙤약볕에서 김을 매는 아내들을 더 이상 만나 볼 수는 없는 세상이 되었어도 여전히 애련가를 불러 주어야 할 아내들은 주위에 구름처럼 많다.

수십년을 나잍근무를 하면서 자녀들을 대학원까지 공부시킨 아내덕에 후덕한 노년을 보낼 수 있는 남편도 있고, 앵벌이 시키느냐고 곱게 눈 흘기면서도 불평없이 하루 8시간 꼬박 반복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아내가 있어 마음 놓고 공부한 남편도 있다. 철없는 남편들이여! 누구처럼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라는 애련가를 매미처럼 불러도 아마도 아내들은 “골비었어 또 당신을 만나 이 고생을 하게!”라고 말할 것이니 매일 매일 아내에게 잘할 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