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313년에 기독교를 인정하는 명령을 내리면서 기독교의 핍박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네로황제 이후 핍박받던 기독교가 더 이상 불법적인 존재가 아닌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밀라노에서 이 명령을 내렸다고 하여 이것을 ‘밀라노 칙령’이라고 부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수도를 오랜 역사의 도시 비잔티움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붙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은 본래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인 콘스탄티노폴리스였습니다. 후에 이 도시는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뉘었을 때 동로마와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 오랜 세월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터키에 있는 그 도시는 1453년에 오스만 터키에게 점령된 이후 이슬람이 많은 도시라는 의미의 이스탄불로 불리고 있습니다. 필자가 이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역사 유적들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 도시에 360년에 목조지붕으로 된 작은 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불에 타 없어지고 새로 지어져 지금도 남아있는 데 그것이 유명한 소피아 대성당입니다.

밀라노칙령이 기독교의 핍박을 멈추게 하였다면 그후 데오도시우스 1세는 380년에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한 역사적인 인물이 되기도 합니다. 콘스탄티누스황제가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는 로마제국의 유일한 신앙으로 기독교를 선포한 인물입니다. 그는 기독교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본래 군인이었으나 그라티아누스황제에 의해 동부지역을 다스리는 공동 황제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신앙의 자유를 얻고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가는 때에 로마제국은 쇠퇴해가고 있었습니다. 제국은 안으로는 풍요로움 속에서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늘 정복전쟁을 하던 나라가 태평한 세월을 보내자 내분에 빠져들었고, 귀족들의 극에 달한 사치와 방탕의 한편에는 수많은 빈민들이 존재하였습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북부의 게르만족의 침입 등이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은 매우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지금의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있는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살던 부족으로 남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살던 다른 게르만족들을 물리치고 3세기에는 로마가 지배하던 다키아, 즉 지금의 루마니아 지방을 로마제국으로부터 빼앗기도 하였습니다.

다뉴브 강 유역에 거주하게 된 고트족을 서고트족, 그리고 우크라이나지방에 거주하게 된 이들을 동고트족으로 불렀습니다. 그들의 이동에 의해 다른 부족들이 이동하며 로마제국의 국경이 무너지고 많은 영토를 그들에게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400년대 초반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 계통인 훈족이 유럽을 침공하였습니다. 그들은 중국과 한국사에 나오는 흉노와 같은 일파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여러 부족들로서 중앙아시아의 넓은 지역을 지배하며 동으로는 중국과 만주지방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서쪽으로는 유럽까지 진출하여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민족입니다. 그 훈족에게 밀린 서고트족이 본래 거주지인 다뉴브 강 일대에서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자, 동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은 그 영향으로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406년 라인강 방어선을 지키던 로마군이 서고트족의 위협에 직면한 로마를 지키기 위해 라인 강 방어선에서 철수하자, 반달족은 이틈을 타 지금의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로 이주했습니다. 이때 훗날 프랑크 왕국을 세운 프랑크족도 본래 거주지에서 서진하여 갈리아로 이동했던 것입니다.

반달족은 계속 남진하여 에스파냐를 거쳐 북아프리카로 건너갔고, 옛 카르타고 땅을 중심으로 북 아프리카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그 반달족은 이동하면서 해적질과 각종 약탈 및 파괴 행위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로인해 반달리즘이란 말이 생긴 것입니다.

이렇게 4세기에서 5세기 초에 이르는 당시 로마는 주요 식량 공급지였던 북아프리카를 반달족이 차지하게 되어 심각한 식량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되던 당시의 정치적 지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