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에 책 한권 안 읽는 사람이 있을까? 그 대답은 예스이다. 분명 책 한 권 안 읽고 평생을 살아간 사람은 수 없이 많고 많았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든다. 그만큼 사람들의 의식은 가치로 채워야 할 공간은 많은데, 텅 빈 채, 그 공간에 오히려 감정이 채워져서, 감성적인 사람이 되기보단 감정적인 사람이 된 경우는 수 없이 많다.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 전쟁을 경험하신 분들의 정서엔 자기 자신의 의식을 고양하는 자기 개발에 시간을 투자할 만한 여유를 가지지 못하신 분들이 수 없이 많이 계시다. 자식을 위해서, 또는 직장과 조국을 위해서 가정의 희생을 요구 받던 시대적 환경 때문에 그렇기도 했다. 결국 교육은 어머니의 몫으로 남겨지고, 남자의 몫이란 일벌레처럼 이런 저런 비굴을 감수하고 집안의 경제적 요구를 채워야 만 될 만큼 생존의 시기를 거쳤다. 이런 희생이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투자가 부족함으로 마음속엔 수 없이 많은 상처와 화를 담고서도 어쩔 수 없이 감정이 의지를 이겨먹는 감정의 거인으로 인해 어려움과 고통을 겪는 예는 수도 없이 있다. 모순에 비굴하게 굴복해야 하는 상황에서 힘 있고 파워를 가진 자에게 ‘예스’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현실들, 그런데 이런 사람만이 어떤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불합리성에 아무 말 하지 못했던 환경은 특히 한국 사람들이 어느 시대를 거치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정서이었기도 했다. 그래서 마음속에 화를 키우고, 역시 화병이란 한국사람 만이 갖는 고질 적인 병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한이란 독특한 정서가 되어 체념이 체질화 되어 버린 운명론 적인 사고방식을 배태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 상처를 당해오신 어른들의 삶을 읽어 내지 않으면 변환기의 목회에 혹시라도 어른들을 뒷방 신세처럼 취급하지 않을까 조심성과 배려를 가지고 목회하는 풍성한 감성, 유연성과 거룩한 지성을 가짐도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목회일선에선 상한 감정이 충만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일 어렵지 않다. 이런 만남의 변수로 인해 스스로 상처가 목회자에게 전이되어 역시 자신도 모르게 탈진되어 지는 현상은 잘못하다간 부정의 달인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역시 감정적인 사람으로 변질되어 버려 누군가 톡하고 건드리기만 하면 터지기 쉬운 사람으로 상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든지, 아니면 은폐된 공간으로 회피하는 사람으로 쳐지던지 한다면 이는 큰 일일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준비된 영성과 그 어떤 상처라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말씀의 능력 안에 늘 리바이벌 되어지는 거룩한 내성이 감정에 지배당하기 보단 감성이 흐르는 사람으로 있게 되는 것, 참으로 귀하리라 여겨본다. 아울러 미국 동남부에서 살아가는 특혜, 즉 남부 깊숙이 스미어 있는 미국적인 정서를 이해하기 위한 남부 기행이나 사진 여행 같은 짬을 냄도, 아니면 작지만 역사가 있는 교회 탐방으로 감정을 순화시켜 사람을 만나고 대함에도 유연함과 넉넉함이 흐르는 사람으로 있다는 것 괜찮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이런 여유와 정서를 갖춤은 불합리했던 시대를 살아가신 분들을 이해하고 잘 섬기는 빚 갚음도 교회와 목회자 또는 성도의 역할로 남지 않을까 여겨 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리저리 상처 받고, 상한 마음과 감정이 거인이 되어 버린 사람들을 섬김이, 목회자는 물론 성도의 몫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스스로 감성이 넘실거릴 만큼 넉넉한 사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사랑하는 영성의 사람으로 있길 소원해 봄은 감성적인 사람보다 감정적인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밖에 없는 목회자로서 또는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한 사람이 되길 기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