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시대에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된 심한 박해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이르러 멈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본과에서는 그 배경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235년에서부터 284년에 이르기까지 39년 동안 23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혼란의 시기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디오클레티아누스(Valerious Diocletianus) 황제가 위에 오른 후 그는 너무나 넓은 제국을 둘로 나누고 서부는 공동 황제의 자리에 막시미아누스(Marcus Aurelius Valerius Maximianus)를 세우고 자신은 동부지역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아내와 딸이 기독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305년 로마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던 두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고, 그들의 부황제인 갈레리우스(Galerius Maximianus)와 콘스탄티우스가 뒤를 이어 공동 황제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동로마에서는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누스가 갈레리우스를 몰아냈고, 서로마에서는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콘스탄티누스를 무시하고 콘스탄티우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동로마에 있는 아들을 보내달라고 갈레리우스에게 요구했고, 콘스탄티누스는 적대적인 세베루스의 영토를 가로질러 게소리아쿰, 즉 지금의 프랑스 불로뉴에 있는 아버지 곁으로 갔습니다. 이들 부자는 함께 지금의 영국인 브리튼섬으로 건너가, 306년에 콘스탄티우스가 에보라쿰 즉 지금의 잉글랜드 노스요크셔 주 요크에서 죽을 때까지 브리튼 섬 북부원정을 벌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잇달아 일어난 복잡한 내전에 전념했습니다. 퇴위한 서로마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동로마의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를 몰아낸 세베루스를 서로마 황제로 선언했지만, 세베루스는 다시 리키니우스에게 쫓겨났고, 반란을 일으킨 막센티우스는 아버지 막시미아누스의 도움을 얻어 세베루스를 진압했습니다.

아들에게 버림받은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와 합류했지만, 결국 콘스탄티누스를 배신하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307년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를 2번째 아내로 맞이한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이탈리아를 침략해 막센티우스를 무찔렀고, 리키니우스와 이미 맺고 있던 동맹 관계를 확인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 황제가 되었고, 리키니우스는 경쟁자인 막시미누스를 무찔러 동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316년 발칸 반도의 영토를 빼앗았고 324년 리키니우스를 패배시켜 동서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Constantinus)는 육군 장교인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그의 아내인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집안은 3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군사 지배 계급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293년 그의 아버지는 부황제(Ceaser)의 지위에 올라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라는 칭호를 얻었고, 황제(아우구스투스)인 막시미아누스 밑에서 부황제로 일하기 위해 서로마로 갔습니다.

289년 아버지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의붓딸과 결혼하기 위해 헬레나와 이혼했고, 어린 콘스탄티누스는 동로마 제국의 니코메디아로 보내져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에서 자랐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콘스탄티누스는 일련의 복잡한 내전을 거친 뒤 312년에 서로마 황제가 되었으며, 이어서 324년에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단독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기독교인에 대한 관용을 확대했습니다. 즉 기독교인들에게 대한 핍박을 멈추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예전 이름이 비잔티움(Visantium)인 도시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개명하여 재건하고 확장시켜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 도시가 지금의 터키의 이스탄불(Istanbul)인 것입니다. 그 도시는 그 후에도 천년이 넘도록 로마 제국 수도의 기능을 유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