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의 어느 교우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한 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해 보았습니다. 부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 것인지를 알 만큼 아는 분입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사업이 기울어 어쩔 수 없이 두 개의 사업체를 연달아 처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사람의 가게를 맡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씀씀이를 생각하면 지금의 생활고를 견디고 산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의 사업의 규모를 생각하면 옹색하고 초라한 지금의 가게에서 주인이 아니라 매니저로 일하면서도 웃는 것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돈을 물 쓰듯 쓰며 살 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처음 가난해 보는데, “가난한 것도 참 좋은 것이로구나!” 싶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진짜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군!”이라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제가 언젠가 ‘가난의 행복’에 대해 말했더니, 그 말을 들은 분이 “목사님, 처자식 굶겨 본 일 있습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가난에 대해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처럼 지독한 가난 즉 핍절 상태(destitution)를 겪어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난을 행복으로 여기고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 같은 가난은 치료되어야 할 질병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그 교우께서 말하는 가난은 끼니를 굶을 정도는 아니지만 기본적인 생활을 하기에 빠듯할 정도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요즈음 스스로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답니다. “오늘 하루만 행복하게 살자.” 풍요를 잃어버린 다음부터 생긴 생활 철학이라고 합니다. 멀리 내다 볼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매일 하루만 생각하며 사는 것이 이렇게 자유로운 것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미래에 대한 아무 대책 없이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내려놓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여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One day at a time! 한 번에 하루씩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제시한 삶의 방법입니다.

저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마음 놓고 자매님에게 물질을 맡기시겠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왜요?”라고 물으셔서 제가 대답했습니다. “이제 물질에서 해방되었으니 물질을 제대로 관리하고 사용할 능력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런 능력을 받은 분에게 하나님께서 많은 물질을 맡기시지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그 자매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바라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니에요. 그저 제 마음이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그 말씀을 듣고 저는 그분에게 일어난 변화가 진실한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진실로 물질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것도 좋더라구요!”라는 말이 진심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하신 말씀을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눅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