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 집 앞 마당에, 교회 앞마당에도 봄이 왔다. 가만히 보니 이름 모를 보라색 꽃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손톱만도 못한 꽃의 자태는 현미경으로 보아야 그 가치가 발견될 만큼 심히 작은 꽃에도 아름다움을 공교히 가미하신 하나님의 솜씨에 솔로몬의 영광도 들의 백합화 보다 못하다는 말씀,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마당을 보면 삐죽 삐죽 튀어 나온 녀석들이 있는데, 이놈들을 달래라고 부른다. 달래하면 된장찌개에 넣어서 먹을 법한데, 비온 후 쭉 뽑아 말끔히 씻어서 찌개에 넣으면 그 향이 참 좋다. 그럼에도 잔디 깎을 생각을 하면 이들은 불청객이다. 쭉쭉 튀어나온 폼이 기계 충으로 머리의 숱이 듬섬듬섬 난 꼴처럼 보기는 좋지 않지만 봄이 왔으니 보아 달라는 듯이 쭉쭉 삐치어 있다.

그런데 무슨 심사인지 봄이 되어 잔디가 자라니 걱정이 앞선다. 즉 남부의 봄은 봄의 축제를 기대하고 경험하기 보단 은근히 마음속에 잔디 깎을 걱정거리가 앞선다. 집 앞 마당, 교회 마당, 할 일이 많아진다. 겨울과 봄 사이의 완충 역을 하는 꽃샘의 추위를 맞보면서 잔디가 더디게 자라났으면 하는 기대가 무너져서 그런 것인지 걱정을 앞세우는 우매함, 이런 인간의 우매를 보시고 하나님은 내일일은 내일 걱정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규모가 작은 교회를 섬기시는 목사님들의 마음은 늘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물론 규모가 큰 교회 목사님이야 말할 나위 없이 늘 큰 빚과 여타 어려운 일에 시달리지만, 작은 규모의 공동체를 섬기는 목회자에겐 성도와의 거리가 늘 지근거리이다 보니 모든 것이 다 노출되지 않을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목회자 뿐 아니라, 사모, 그리곤 아이들까지 모두 노출되어서 시험거리를 제공하지 않을까 생각이 늘 많다.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이 노출되어 성도들과 함께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이런 저런 갈등 막을 장사는 없다.

한번은 양말을 거꾸로 신고 설교하는 바람에, 거꾸로 신은 양말을 본 성도보다 후에 양말이 거꾸로 된 것을 알게 된 목사가 되레 시험이 들었다. 즉 설교중 성도의 시선이 양말에 향하게 되고, 그리곤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이 드신 모양이다.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런 교회를 다녀야 하나?“하는 고민이 있는 듯, 결국 몇 주 만에 교회를 떠나셨지만, 목사의 마음엔 양말이 웬수가 된 것처럼 후회의 잔 감은 오래 남는다. 사실인즉 양말이 문제가 아닌, 이미 오실 때부터 잠시 머물 생각으로 오신 분이었지만, 이런 저런 배움과 위로가 있다면 좋은 교회에 가셔서 더 나은 신앙 생활하신다는 소리에 감사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한 성도가 갖는 믿음의 여정엔 수 없이 많은 목회자 분들의 손을 거치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이 유독 많이 드는 이유는 개척교회하면서 남아 계시는 분 보다 지나치시는 분들이 더욱 많음을 경험하기 때문 같다. 그리곤 규모가 작은 교회의 역할이 꼭 여인숙같이 하룻밤 머물다 지나가는 손님을 보내듯, 잘 모시고 잘 보내 드림도 작은 교회의 역할이 아닐까 지극히 감성적인 생각을 가져본다. 그리곤 좋은 교회, 좋은 목사님에게 더 깊은 신앙의 여정을 경험하시도록 기도하면서 안내자 역할을 감당함, 킹덤 마인드(Kingdom Mind)로 바라본다면 송구함과 섭섭함에 위로가 생긴다.

봄이 왔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위로하시고 더 큰 창조의 세계를 바라보며 여유를 가지라고 계절의 순환, 즉 봄을 주신 것 같다. 말하자면 봄의 축제, 이곳저곳에 피어난 봄꽃들의 색채는 역시 가을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날마다 선사 받는다. 하나님이 만드신 봄의 색상들, 노랑, 분홍, 하얀, 보라, 빨강..., 이렇듯 섬세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특별한 은혜에 스스로 만든 걱정이 얼마나 작고 우매한 일인지 봄을 선사하신 하나님께 찬미를 올려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