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독일에서 온 한인 광부와 한인 간호원
1968년 7월부터 새로운 이민법이 효력을 발생하면서 다수의 한인들이 본격적으로 미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미국의 한인 사회에서는 흔히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전반기를 한인 이민 초기라고 부른다. 애틀랜타 한인 사회에서도 이 시기를 이민 초기라고 부른다. 특히 애틀랜타에는 1972년에 다수의 한인들이 애틀랜타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이 시점이 애틀랜타 초기 한인 이민 초기를 더욱 한정적으로 말하여 1972년경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이러한 애틀랜타 한인 이민 초기의 인구 증가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이 간호원이었다. 이 간호원들은 1971년과 1972년에 많이 들어왔는데, 당시 애틀랜타에서는 한국 간호원 자격이 그대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 등에서 이러한 소문을 들은 간호원들이 수십 명씩 몰려온 것이다. 이 간호원 중에는 독일에서 바로 미국으로 들어온 간호원들이 있었다. 독일에서 바로 들어온 간호원이나 한국에서 직접 온 간호원들은 일단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등을 경유하여 애틀랜타로 들어왔다. 미국 초기 이민사에서 독일에서 온 간호원이나 광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컸다.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총 1만 7천 명의 한인 간호원과 한인 광부가 서독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들 중에 계약 기간이 만료된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다. 서독으로 이주한 간호원과 광부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들어왔는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전반에 한국의 간호원 자격을 가진 사람들은 미국으로 이주하는 것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이들 중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것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이들 중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독일에서 생활하였던 한인 간호원들은 선진국에서 생활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한인 간호원보다는 미국 이주에 대한 위험 부담을 덜 겁내었을 것이다.

독일에 갔던 한인 간호원 중에서는 독일에서 만난 한인 광부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1971년 애틀랜타에 이주하여 정착한 이재학-이국자 부부는 바로 독일에 갔던 광부와 간호원 출신이었다. 이재학씨는 한인회에서 최초로 직접 선출한 한인회 이사회(1975년 2월 22일)의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초기 한인 사회에 기여하였다. 또한 이 부부가 나중에 초청하여 미국에 들어온 형제자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등 이민 총수가 2001년 12월 현재 100여 명을 훨씬 넘는다는 점에서도 애틀랜타 한인 사회에 기여하였다고 하겠다.

이국자씨(애틀랜타 이 장의사 대표)의 증언
이국자(처녀명 서국자)씨는 1966년 간호원으로 서독에 갔는데, 1967년 독일에서 광부로 일하던 이재학씨를 독일 함부르크 영사관에서 만났다. 이재학씨는 당시 미국 뉴욕으로(관광비자로) 가는 수속을 밟고 있었다. 여기서 만난 이국자씨와 이재학씨는 독일과 미국 사이에서 여러 번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이국자씨는 1969년(관광비자로) 미국으로 들어온 다음에 간호원으로 암을 공부하면 장학금을 준다는 얘기를 듣고 뉴욕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970년 뉴욕에서 이재학씨와 결혼하였다.

이 부부는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잠시 있었는데, 1971년 초 로스앤젤레스에서 큰 지진을 경험하고 로스앤젤레스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조지아 주에서는 한국의 간호원 자격이 그대로 인정된다는 광고를 보고 애틀랜타로 가서 정착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이재학-이국자 부부는 아직 한 살이 안된 딸(이티나)을 데리고 자동차로 대륙을 횡단하였는데, 이 대륙 횡단은 그 당시에는 상당한 모험이었다. 1971년 5월경에 애틀랜타에 도착해서는 당시 한인 회장 문희석(문사이러스) 목사 댁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그의 도움을 받아 간호원으로 취직하였다.

이재학씨는 애틀랜타에서 얼마 동안 공장에 다니다가 조경업을 시작하였다. 1978년 3월 16일자 한국일보(애틀랜타 지국 김학규 지국장 보도)에 의하면, 애틀랜타 북쪽 마리에타에 살고 있는 이재학씨는 41번 하이웨이 마리에타 지역에 2.5에이커의 대지를 구입하여 400여 종 이상의 정원수를 가진 수목원을 열었다. 이로써 이재학씨는 존슨 페리 로드에 있는 수목원과 함께 약 4에이커의 수목원을 갖고 조경 사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3년 3월 22일자 한국일보(미주 소식: 애틀랜타 지국)는 당시 조지아 주 공화당 자문위원인 이재학씨가 귀넷카운티 노크로스에 에이스 하드웨어(철물점)와 식목원을 시작하였다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이 에이스 하드웨어는 1.5에이커 대지 위에 자체 건설한 5천 5백 스퀘어피트 건물을 갖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건설 자재 및 철물점 홈디포 체인이 확산될 무렵 이국자씨는 화원을 차렸고, 2000년 2월 중순에는 장의사 사업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