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세기 말의 로마제국의 황제들: 네르바와 트라야누스

초대 기독교의 배경이 되는 A.D. 1세기의 로마제국의 황제들을 정리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초대 황제가 되는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시작하여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그리고 네로까지를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네로 이후 권력의 공백기에 군인들이 서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려하여 약 1년 동안 세 명의 황제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들은 갈바, 오토, 그리고 비텔리우스황제로서 그들을 군인황제로 구분합니다.

그들 이후 마지막 군인황제 베수파시아누스로부터 시작하여 티투스, 도미티아누스까지 플라비우스 왕조로 부릅니다. 그리고 지난 글에서 마지막에 언급된 황제 네르바로부터 약 100년간 네르바 안토니우스 왕조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과 초대 기독교 역사를 살피면 로마의 황제들의 이름들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상식은 성경과 교회사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네르바(Nerva)는 96년 9월부터 98년 1월까지 짧은 기간 황제의 자리에 있던 인물입니다. 그는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라는 의미의 ‘5현제’ 가운데 첫 번째 황제입니다.

유명한 원로원 집안에 태어나 황족인 율리우스 칼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의 여자와 결혼했으며, 71년과 90년에 콘솔(집정관)을 지냈으며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당한 뒤에 황제가 되었습니다. 은퇴했던 수많은 원로정치가들이 정계에 복귀해 그가 제국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왔는데, 네르바 정권의 기본 방침은 폭군 도미티아누스가 공포정치를 위해 행사했던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농지개혁 조치를 비롯한 백성들을 위한 여러 제도를 만들고 시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후계자를 확실히 정해놓기 위해 97년에 게르만 속주의 한 지방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를 양자이자 공동 통치자로 삼았는데, 그는 네르바가 죽은 뒤 황제가 되었습니다.

네르바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Traianus)는 로마인으로서 스페인에서 태어났으며,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까지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많은 건축을 하였으며, 제국의 영토를 넓히는 전쟁들을 수행하였습니다. 또한 네르바에 의해 준비되었던 여러 복지 정책들을 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후대의 로마인들은 트라야누스의 업적과 건축 사업에 매료되어 그의 재위기간을 초기 제국의 절정기로 간주했습니다. 4세기의 역사가 유트로피우스는 원로원이 황제에서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아우구스투수 보다 더 운이 좋고, 트라야누스보다 더 훌륭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말하는 것이며, 그가 예수님의 탄생 당시에 로마 황제였습니다. 성경의 가이사 아구스도가 바로 그인 것입니다. 그리고 트라야누스에 의해 지금의 동유럽의 루마니아 지역인 다키아가 정복되었으므로, 오늘날의 루마니아인들은 자신들이 트라야누스가 다키아에 정착시킨 로마인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합니다. 루마니아라는 말은 로마인의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소아시아 반도의 북부해안의 속주인 비티니아와 폰투스가 있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의 표현으로는 비두니아와 본도로 번역되어 있는 지명입니다. 그곳으로 플리니우스라는 인물이 총독직을 맡은 2년 동안 그와 트라야누스황제 사이에 오고간 편지들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은 로마의 식민지의 행정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자, 당시 기독교에 대한 정책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한 편지에서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에게, 급격히 확산되는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처리할지 묻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들은 일반적인 종교관행에 따르기를 거부해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기는 하지만 플리니우스가 보기에는 아무런 해가 없는 집단이었습니다. 답장에서 황제 트라야누스는 그리스도교들을 괴롭히거나 그들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을 받아들이지 말고, 명백한 반항을 저지르는 사람들만 처벌하도록 권고했습니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로마 정부는 기독교인에 대하여 관대한 입장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