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펀펀이 노는 것 같은데 공부를 잘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시험만 잘보고 성적만 잘 얻었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런가하면 허구헌날 책상에 눌러 있어서 밤샘을 하는 것 같은데 공부가 시훤찮은 친구도 있었습니다. 무엇때문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집중력이었습니다. 전자의 친구는 수업시간이나 자신이 공부하는 시간에는 전혀 한눈 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자의 친구는 오랜 시간을 책상에 앉아있는듯하나 이성에 대한 생각, 먹을 것, 온갖 잡념으로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이 집중력이 두사람의 능력을 차이나게 만든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도 분명 그런 면이 있습니다. 신앙의 집중력이 그 사람의 믿음의 결과를 차이나게 만듭니다. 교회를 다니고, 종교 행위를 한다고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삶의 초점을 누구에게 맞추는가가 중요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온갖 세상의 잡다한 일에 관심을 두다보니 전혀 신앙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앙의 열매를 맺으려면 한 분만을 기쁘시게 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링컨은 그랜트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링컨이 승리를 호언장담하자 이상하게 여긴 참모들이 물었습니다. “병력이나 전황의 변화가 전혀 없는데, 어떻게 승리를 확신하십니까?” 그러자 링컨이 대답했습니다. “그랜트가 나 못지않게 이기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네.” 링컨은 그랜트가 승리를 위해 집중하는 것을 보고 승리를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가 그랜트 이전에 스코트, 맥도웰 등 여러 지휘관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심지어 그 시대 최고의 전략가라고 하는 할렉이라는 군사 전략가를 사령관으로 임명해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승리를 위해 집중하는 사람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을 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집중은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돋보기를 통해서 집중된 빛은 종이를 태우게 됩니다. 바르게 집중하는 사람은 일을 이루어냅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집중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미끼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한눈파는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자라면 죄를 낳습니다 (약 1:15). 욕심을 부리는 것은, 인생을 바둑 경기로 생각해보았을 때 무리수를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자연스러움을 빼앗습니다. 무리하게 악수를 두게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한빛 교회에 새로 부임하게 되자 이 교회를 전부터 잘 안다고 하는 어떤 분이 물었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의 입맛을 맞추려면 꽤나 힘들겠어요.”염려하며 물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많은 교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여기에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직 한 분만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바른 집중은 올바른 능력이 됩니다! 요즈음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대일수록 집중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을 저는 가지치기라고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