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초기 한인 사업체의 등장 과정
(1) 가발 가게를 중심으로 본 한인 사업체의 등장 과정
미국에서는 1960년대 초부터 가발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가발 소매 판매액이 1960년에 1천만 달러에 불과하였지만, 1969년에는 10배 증가하여 5억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가발 붐 때문에 1960년대에 한국에서는 한인 머리카락을 미국의 가발 제조업자들에게 수출하였다. 원래 한인 머리카락은 검고 거칠기 때문에 가발의 재료로서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염색약이 개발됨으로써 한인 머리카락도 좋은 가발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곧 한국의 수출업자들이 한인 머리카락으로 직접 가발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여 보다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1967년 일본에서 인모(머리카락) 대용으로 합성섬유 카네칼론(Kanekalon)을 발명하였는데, 한국의 가발 제조업자들은 독점적으로 이 기술을 이용하여 미국에 인조 가발을 수출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중요한 대미 수출품으로 자리잡았다. 한국 가발 수출액은 1971년에 한국 총 수출액의 6.5%를 차지하였을 정도였다. 한국에서 가발 제조업자 수는 1967년에 43개, 1972년에 169개에 달하였고, 1977년에는 96개로 떨어졌다.

1970년경에 한국에서 생산한 인조 가발은 30달러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생산한 인조 가발은 가격이 매우 저렴하였기 때문에 미국 흑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초에 한국산 인조 가발을 파는 한인 가발 가게가 저소득층 흑인 동네를 중심으로 많이 들어섰다. 당시에 한국의 가발 제조업자들과 미국의 한인 가발 수입업자들은 흑인 동네에 가발 가게를 개업하게 함으로써 사업의 확장을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한인들이 가발 사업을 시작하였다. 심지어 한인 유학생들 중에도 공부를 포기하고 가발 사업으로 전환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에 인모 가발은 인조 가발보다 수십 배나 비쌌기 때문에 백화점에서나 팔리고 있었다.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68년 7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65년에 새로운 이민법이 개정되었지만, 이 법이 실제로는 1968년 7월 1일부터 효력을 발생하였다. 이 새로운 이민법에 의해 전문직, 기술직 직종의 자격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 다수가 이민으로서 미국으로 유입하였고, 특히 아시아에서 많은 이민들이 미국으로 유입하였다. 많은 한인들도 이 새로운 이민법에 의하여 미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가발은 한국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가발 사업이 1960년대 말부터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의 첫 미국 사업이 된 것이다. 애틀랜타에서 가발 사업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에 속하는 이영호씨는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비록 미국에 살고 있지만, 고국의 경제 발전과 연관 관계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국의 덕을 크게 보았다고 느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영호씨는 “그 당시 애틀랜타에서는 도심부를 중심으로 20여 개의 한인 가발 가게가 개업하고 있었고, 가발 붐이 애틀랜타를 중심으로 동남부 주위 중소도시로 확산되었다”고 증언하고, 한인들이 흑인 가발 시장을 독점하게 된 이유는 “가발이 한국에서 수입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한인들에게 구매의 이점이 있었고, 또한 미국 주류 상인들이 흑인 시장의 구매력을 무시하면서 덤벼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한인들의 가발 사업은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유행이 바뀌어서 가발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던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한인들 사이에 경쟁이 심화되자 가발 가격이 크게 낮아졌고, 가발 소매업자들의 이윤은 대폭 줄어들었다. 가격이 낮아졌지만 가발의 수요는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한인 가발 소매업자들은 가발 사업을 포기하거나, 가방, 보석, 장신구, 모자 등의 상품을 추가로 진열하여 판매하거나, 다양한 물품을 구비하여 잡화상으로 전환하거나, 또는 의류상이나 신발 가게 등으로 업종을 전환하였다. 가발 사업에서 얻은 자본의 축적과 경험을 토대로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였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의류, 가방, 보석, 장신구, 신발류 등도 한국에서 수입한 상품이었다. 한국의 가발 제조업자들은 봉제 공장이나 신발 공장 등 다른 노동 집약적인 산업으로 업종을 전환함으로써 변화에 적응하였다. 1975년 한국은 11억 5천만 달러의 의류와 1억 9천만 달러의 신발류를 수출하였는데, 이것은 각각 당시 연간 총 수출액의 22.6%와 3.8%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한국산 제품이 미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미국의 한인 수입업자들이 중간 브로커로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는데, 이들은 또한 흑인 동네의 한인 소매상에게 한국산 제품을 분배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애틀랜타에는 1974년 첫 남성의류점이 도심부에 개업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