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최초의 한인 교회 ‘애틀랜타 한인 교회’ 설립과 발전
애틀랜타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교회는 ‘애틀랜타 한인 교회’로 알려져 있다. ‘애틀랜타 한인 교회’는 1971년 1월 10일 문희석 초대 목사와 교인 약 20명이 에모리(Emory) 대학교 캔들러(Candler) 신학교에서 창립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하였다. 애틀랜타 한인 교회는 창립 당시엔 초교파적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1대 목사인 문희석 목사, 2대 조석환 목사, 3대 김세희 목사가 모두 장로교 목사였지만 교파를 구분하지 않고 다만 애틀랜타 한인 교회라고만 하였다. 1974년 9월로 접어들면서 두 교회로 분리가 되었다. 애틀랜타 한인 교회에서 애틀랜타 한인 장로 교회가 분리되어 나온 것이다. 애틀랜타 한인 교회는 1988년 6월 16일 마침내 미 연합 감리 교회 North Georgia Roswell District에 가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애틀랜타 한인 교회는 1971년 창립 예배를 드린 이후 1989년 4월 16일 새 성전 건축이 완료되어 입당 예배를 드림으로 자체 교회를 소유한 한인 교회로 성장하였다.

1982년 11월 18일엔 한국의 선각자인 함선헌 옹, 1985년 9월 15일엔 김영삼 장로, 1986년 1월 26일에는 박대인 감신대 교수가 각각 집회를 가진 바 있다. 초대 문희석 목사, 조석환 목사로부터 시작하여 김세희 목사, 전동식 목사, 남재현 목사, 최원택 목사, 김종현 목사, 한상휴 목사, 남기철 목사에 이어 제10대로 김정호 목사가 현재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9. PC USA 교단 소속 교회 창립
감리교 교단의 에모리 대학이 이 지역에 있어 한국의 감리교 목사들이 이 지역으로 많이 유학을 하게 된 동기가 되었듯이, 디케이터(Decatur)에 위치한 콜럼비아 신학 대학(Columbia Theological Seminary)은 미 남 장로교 교단 소속의 신학교이다. 그리고 미 남 장로교 총회가 미드 타운의 Ponce De Leon가에 위치하고 있어 미 남 장로교의 심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73년 미 남 장로교 총회에 김인식 목사가 아세아 태평양 지역 해외 선교 담당 총무로 부임하여 당시 에모리 대학과 콜럼비아 신학 대학에서 유학 중인 목사와 학생들이 합동으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미 여섯 개의 한인 교회가 설립되어 있는 상황이지만 미 남 장로교 교단 소속 교회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김인식 목사는 1977년 3월 13일 North Druid Hills Road와 Clairmont Road가 교차하는 지역에 위치한 컬레어몬트 장로 교회에서 장로회 애틀랜타 연합 교회의 창립 예배를 드려 마침내 미 남 장로 교회 소속 한인 교회가 설립되었다. 초대 목사로 오은수 목사가 취임하였다. 오은수 목사는 한국 대구의 계명대학교와 서울의 숭전대학교에서 교목으로 재직한 바 있으며 1978년 시카고에서 작고하였다.

그 후 미 남 장로 교회와 미 북 장로 교회가 122년 동안 분리되어 있었던 긴 세월에 종비부를 찍고 미 연합 장로 교회(Presbyterian Church USA)란 하나의 교단으로 재 탄생된 것이 1983년이었고, 그 통합 대회를 바로 이곳 애틀랜타에서 가졌다. 북 장로교 총회는 뉴욕에 있었는데 하나의 교단으로 합치면서 뉴욕도 애틀랜타도 아닌 제3지역에 미 장로교 총회를 두기로 결의하여 미 장로교 총회는 켄터키 주 루이스빌(Louisville)로 옮겼다. 이렇게 하여 장로회 애틀랜타 연합 교회는 미 장로교단(PC USA) 소속 한인 교회가 된 것이다. 현재에는 이 지역에 10여개 이상의 한인 교회가 PC USA 교단 소속 교회로 되어 있다.

미 연합 장로교단과 미 연합 감리교단은 한국 초기 기독교 전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두 교단이다. 미 감리교단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배재학당, 이화학당, 연희 전문학교, 세브란스 병원, 정동 교회를 설립하였고 미 남 장로교단과 북 장로교단은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여 평양에 숭실학교, 서울에 경신학교와 정신여학교, 새문안 교회 등을 설립하였다.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고 구한국 개화 역할을 담당하여, 한국 개화기의 신문화는 바로 기독교의 문화를 의미할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