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970년대 전반의 한인 생활
김순응, 변종수, 문희석(문사이러스), 송준희, 황용연, 회장 순으로 한인회장 계보가 이어진다. 최초의 주소록이 1970년에 만들어졌다. 당시 한인들은 주로 스톤마운틴과 노크로스, 마리에타에 거주했다. 1970년 이후에는 다수의 한인들이 한국 혹은 타주에서 이주해 들어와 애틀랜타 한인 사회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점점 한인들의 수가 늘자, 콩나물도 자체적으로 길러 먹고 두부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당시에는 국제 전화료가 너무 비싸 국제 전화를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가끔 한국에 초콜릿을 보내 주면 너무 귀한 것이라 아껴 먹는다는 편지를 받곤 했다. 한국에는 설탕이 귀해서 구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슈퍼마켓에 가면 넘쳐나는 설탕이나 음식들을 보고 가족들을 그리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당시 한인회장은 야유회나 망년회를 준비하여 한인들에게 즐거운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 이주한 한인들이 정착하는 데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1년에 3대 한인회장을 지낸 문희석(문사이러스)씨도 당시에 애틀랜타에 이주한 한인들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하였다. 심지어 새로 온 한인들에게 직장을 알선하는 일도 도맡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민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것으로 알려졌고, 목사의 신분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는 한인 사회의 비난을 받아 중도에 한인회장을 그만두고 물러나는 일이 있었다.

한국 정부의 외환 보유 제한으로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50달러만을 소지하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학생들은 자존심이 대단히 강하였다고 한다. 에모리 대학의 한인 학생들보다 조지아 텍의 한인 학생들이 좀 여유가 있었는지, 당시의 조지아 텍 한인 학생들은 골프를 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여상권 장로(작고)는 1971년 애틀랜타로 왔다. 1970년대 전반에는 애틀랜타의 각 대학에 한인교수들도 몇 명 재직하고 있었다. 1972년 조지아 스테이트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로서 구본호가 있었는데, 그는 후에 한국에 돌아가 울산대 총장을 역임했다. 안낙영 박사 또한 조지아 스테이트 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방창모 박사는 에모리 대학 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당시 조지아 스테이트 대학 수학과 통계학 교수로서 최기한 교수가 있었고, 제6대 애틀랜타 한인회장을 역임한 이봉호 교수가 에모리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1971년 김순응씨 집에서 가정 예배를 드렸고, 문희석(문사이러스)은 에모리 대학 교실을 빌려서 예배를 보았다. 또한 한인 감리 교회 박성용 목사는 다운타운에서 예배를 보았다. 또한 한인감리교회 박성용 목사는 다운타운에서 예배를 보았으며 당시 한인들의 정착을 위해 많은 고생을 하였다. 지형석 목사(당시엔 지흥구였으며 목사가 아니었음)는 방을 빌려 예배 장소를 제공하였다. 1970년대 전반에는 한인천주교회는 없었고 다만 미국 성당과 미국인 카톨릭 신부가 있을 뿐이었다. 애틀랜타 한인교회는 문희석-조석환-김세희 목사로 이어졌는데, 초창기에는 초교파의 교회로 출발하였다.

1974년 연말 정기 총회에서 이봉호 한인회장(박사, 에모리 법대 교수)이 이끌던 한인회가 붕괴되었다. 1974년 연말 정기총회에서는 차기 한인회장 선출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영복씨가(당시 한인회 회칙에 따라서) 차기 한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일부 한인들이 회장 선출의 절차상 하자를 들고 나오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연말 정기 총회가 이러한 문제를 잘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끝나게 되자, 결국에는 한인회가 일시적으로 붕괴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걱정하여 자리를 마련하여 의논하였고, 마침내 한인회 재건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한인회 재건을 위해 최기환 박사(당시 한인회 이사장)와 에모리 대학 수학과 교수 방창모 박사가 한인회 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방창모 박사를 위원장으로 22조로 조직된 한인회 회칙을 만들었다. 이 한인회 회칙에 따라 1975년 2월 15일 밤 8시 250여명의 한인들이 Decatur Recreation Center에서 한인회 선거를 실시하였다. 이 선거에서 10명의 이사가 직선에 의하여 선출됨으로써 한인회가 복원되었다. 직선 이사들에 의하여 임명된 2명의 이사를 포함하여 12명으로 이사회가 구성되었고, 이사회는 1975년 2월 22일 Skyline Motel에서 가진 모임에서 이재학씨를 이사장으로 선출하고, 곧이어 조지아 스테이트 대학 정치학 교수 안낙영 박사를 한인회장으로 선출하였다.

1974년경엔 이 지역으로 다수의 한인 간호원들이 취업 이주를 해 왔다. 조지아 주는 간호원의 부족으로 다른 주나 다른 나라의 간호원 자격증을 갖고도 취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부터 취업차 애틀랜타로 이주해 온 간호원들은 가족을 동반해 올 수 있었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아내들은 병원에 간호원으로 출근하지만 남편들은 일단 무직으로 집을 지키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들 연락이 되어 모이게 되고 서로 이런 저런 정보 교환도 하면서 무엇인가 일자리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때 역시 간호원 아내와 함께 애틀랜타에 오게 된 문대호씨는 그 중에서도 영어를 구사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 문대호씨의 증언에 의하면 간호원 아내를 둔 남편들은 아내가 출근하고 나면 그저 소일하기가 힘들어 무엇인가 해 보자는 의욕을 갖고 있었으나 막상 일자리를 찾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언어의 장벽 때문이었다고 문대호씨는 회장한다.

그 때 마침 Munford Company가 여러 곳에 매직 마켓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문대호씨가 먼저 매니저로 취직하면서 일자리의 활로가 열렸다.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인정받은 한인들이 하나둘 매직 마켓에 문대호씨를 통하여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저 놀고만 있던 그들에겐 새로운 활로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능력이 인정되어 매니저로 발탁되어 매직 마켓 운영에 한인들이 혁혁한 공로를 세운 것이다. 점차 이들은 매직 마켓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나둘 소형 서양 식품점을 인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아마 이런 연유에서 이 지역 한인들이 아직도 식품점에 많이 종사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안낙영 한인회장 이전에는 한인들이 모임을 가질 경우 30명 내지 40명의 한인들이 모였지만, 1975년 2월 안낙영 한인회장 선출 때는 실로 많은 한인들이 모였다. 이 모임에서 제안된 것이 한인회 예산의 10%를 따로 모아 한인회관 건축기금으로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건축 기금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꾸준히 축적되어 수천 달러의 기금이 모이게 되었는데, 이는 후에 한인회관 건립에 큰 역할을 했다. 방창모 교수는 1975년 한인회 수습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나중에 한국 학교 3대 교장을 지냈다. 방창모 교수는 전반적으로 한인 사회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나서서 일을 해결하는 데 앞장을 섰다.

▲신영교씨는 현재 도라빌 소재의 창고식품을 운영하고 있다.
1970년대 초에 송희일, 이하두(동양 식품), 신영교(아세아 식품)씨에 의하여 동양 식품점이 생겼다. 1969년 당시 중국 음식점은 Mid Town과 Buckhead에 있었다. 최초의 한국식 중국 음식점으로는 뷰포드가(Buford Highway) 남쪽으로 Peking Restaurant가 문을 열었다. 일본 식당으로는 다운타운에 Ichiban이 있었는데, 이 식당에도 생선회는 없었다.(김선희씨 한인 초청 간담회 증언). 오영택씨가 Peachtree st.와 5가가 교차하는 지점에 1977년 개업한 징기스칸을 은호기씨(현재 다니엘 기도원 원장, 연합장로교회 은퇴 장로)가 1978년 인수하여 코리아하우스로 운영하였는데, 이것이 초초의 한식 전문 음식점이었다. 그 후에 Ponce De Leon 선상에 한국관과 조선옥이 곧이어 개업하였다. 1982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망명 시절에 송기룡씨가 공항에 나가 김대중씨를 영접하면서 적극 후원이 이루어졌다. 이때 한인들이 가이드 겸 안내차 만남을 가졌고, 함께 코리아하우스(대표 은호기)와 한국관(대표 송기룡: 현재도 운영)에서 식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