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에모리 대학 학생은 조종남(신학대학원 재학, 후에 서울 신학대 총장 역임), 한완상(사회학과 재직, 후에 통일부 장관과 부총리 역임), 임희섭(후에 고려대학 대학원장 역임), 전산초(간호대학 재학, 후에 연세대학교 간호대학장 역임), 박종민(화학 전공, 후에 한남대 총장 역임), 이상섭(영문학과에서 최초로 박사 학위를 획득, 후에 연세대학 교수 역임)등이 있었다. 조지아 텍에는 박유순(후에 에모리 대학 재학)의 오빠를 비롯하여 한인 4명 내지 5명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1962년 11월 송준희 씨가 C&S뱅크, 레크레이션 센터 유도사범으로서 애틀랜타에 들어왔는데, 그는 한국에서 대학 조교를 지내고 동경 올림픽 전지 훈련을 하다가 미국으로 들어왔다. 송준희씨는 당시 조지아 텍에 민호식 박사(생물학)의 송준희, 송출연, 강모(현재 시카고 거주), 전모(작고)의 학생 4명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이 때까지도 한인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신학대학원 박사 과정에 있던 조종남, 남기철 목사와 몇몇 학생들은 매주 에모리 대학 캠퍼스 채플실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정식 교회는 아니었지만 학생들을 중심으로 예배를 보았다는데 이것이 몇 년 후 태동하게 될 애틀랜타 한인 교회의 시초가 된 셈이다. 기독교 교인이 아니더라도 대부분 학생들이 예배에 참석햇다. 당시에는 천주교 신자를 포함하여 개신교의 각 교파를 초월해 그냥 하나가 되어 예배를 보곤했다.

그 당시는 애틀랜타에 한국 영사관이 없었기 때문에 워싱턴 대사관에서 영사 문제를 처리했다. 문화의 혜택도 거의 못 받던 시절이라 어렵사리 한국 영화라도 구하면 서로 돌려 보거나 모여서 함께 보았다. 또한 스톤마운틴 공원으로 자주 야유회(피크닉)를 갔다. 누가 모이라고 하지 않아도 어느 새 연락이 되어 스톤마운틴 공원에서 바비큐나 밥을 해 먹고는 금방 헤어지기 아쉬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러면서도 늘 한국을 그리워하고 뜨거운 애국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없는 살림 가운데서도 한국에 수재라도 나거나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성금을 모아 한국에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 식료품 가게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 식료품을 구하기 위한 여러 아이디어가 창출되기도 했다. 특히 설 등의 명절이 되면 떡국을 끓이기 위해 워싱턴에 떡을 주문하기도 했다. 공항 화물로 부쳐온 떡을 공항에서 직접 인수(픽업)해 와서 같이 나눠 먹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명절 기분을 내려고 했던 정겨운 시절이었다.

안수웅씨는 1964년 9월 애틀랜타에 도착하였다. 당시의 애틀랜타 공항은 구식 공항으로 2층이었다. 안수웅 박사는 알래스카와 시카고를 경유하여 애틀랜타에 왔다고 회고한다. 당시에 이미 안낙영 박사(작고)가 조지아 스테이트 대학에 있었으며, CDC수련의 한인 몇 명, 한인 의사, 조지아 텍에 5명, 에모리 대학에 남기철 외 10명의 한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안수웅 박사가 애틀랜타에 도착한 시기는 한인의 총인원수가 30여 명도 되지 않던 시기였다. 그래서 한인들 모두가 이름을 잘 알고 지내지는 않았지만 어떤 한인들이 살고 있는지는 서로가 알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 한인 학생과 한인 이민을 포함해 30여명의 한인이 애틀랜타에 살고 있었다. 남기철 목사 부인(이계순)이 하루는 두부를 만들기로 하였는데, 간수가 없자 에모리 대학 유학생이던 박종민씨가 아이디어를 내어 의사들이 사용하는 간수 성분의 미국 케미컬 컴퍼티 화학 약품으로 대신해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 중국인 상점에서 캐비지를 사다 고춧가루와 소금을 넣어 약식으로 버무려 김치를 만들기도 하였다. 한인 야유회, 한국 영화 감상, 중국 음식점 식사 등이 한인들의 유일한 낙으로 간주되었다. 그 당시에는 일주일 생활비로 약 15달러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도 흑백 차별은 지속되고 있었다. 흑인은 패스트푸드는 사 먹을 수 있었지만 백인과 함께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도 없었다.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지 못하는 흑인들은 주방을 통해 음식을 배달해 가기도 했다. 또한 버스를 탈 때, 백인은 앞에서부터 앉고 흑인은 뒤에서부터 앉았는데 중간쯤 좌석에서 백인이 자리가 없으면 흑인이 당연히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공원이나 영화관에 흑인은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기차나 버스 대합실도 흑인과 백인이 다른 장소를 이용했고 화장실 역시 흑인용과 백인용이 따로 있었다. 당시에는 흑백차별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당시에는 동양인이 적었기 때문인지 흑인은 동양인을 백인처럼 대우하였다.

남기철 목사는 1925년생이며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하였고 에모리 대학에서 박사 학위(Ph. D)를 취득하였다. 한국 대전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와 학장을 역임하였고, 또한 목원대 총장과 이사장, 한국 협성대학교 조직 신학 석좌 교수를 역임하였다. 가족으로는 부인 이계순시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남기철 목사는 에모리 대학이 감리교에서 제일 가는 대학이기 때문에 에모리 대학에서 유학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1950년대 에모리 대학은 총 재학생이 4천여 명에 불과한 대학이었는데, 한인 학생들이 우수해 좋은 이미지를 남긴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또한 남기철 목사는 윤치호 선생을 세계 선교사에 이름이 남는 거물로 평가하고 있다. 남기철 목사는 1990년부터 1997년까지 애틀랜타 한인 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