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신앙 행위는 공간에 머문다. 신앙이란 행위가 삶의 공간을 채워 감이 인생이란 거룩한 목적을 이루어 가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인생이란 주어진 무대 일 것이다. 그런 무대 속에서 이루어진 인간의 행위가 신앙이란 주제로 연기되었을 때는 영원으로 지속된 거룩한 공간으로 남지만, 신앙이 아닌 인간의 흔적에 집착된 연기였다면 막이 끝날 때 잊히는 행위가 되어 버린다. 그런 면에서 신앙의 행위는 중요하다. 영원이란 절대적 시간을 경험하는 신앙의 흔적은 하나님이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이나 아름다운 신앙 행위가 기억되지 않는 사람이란 이루 셀 수 없이 많지만, 이름이나 행위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겨있길 바라는 집착에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 되어 지는 사람들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미 있는 행위로 자신을 연기해 나간다. 마치 예술가가 아름다운 예술 행위로 예술가의 사유의 세계나 가치를 남겨보려는 존재 행위처럼 의미를 그려 넣으며 누군가의 마음속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간다. 결국 존재란 누군가의 뇌리 속에 기억이 되어주는 사람이란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행위로 가치 행위를 창조하고 푼 욕망이 꿈틀 거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의미 행위가 인간 스스로가 설정한 주관적 가치에 머무름에 큰 혼돈을 야기하곤 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의미의 문제로 가치를 부여함 역시 기준이 애매모호함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살아온 역사 속에 가치와 사상의 문제로 사람이란 존재가 비인격화(Dehumanize) 된 예는 너무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하나님에 대한 존재 여부에 대한 반 기독교적 지성의 반항은 수 없이 많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포스트 모던(Post-modern)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쉽게 공감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사람의 가치나 의미 추구 역시 스크린 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로 늘 남는다. 그만큼 생각의 다원화 현상에 노출된 시대에 살기 때문에 절대적 가치에 대한 수긍과 인정은 어려운 과제로 남는 시대 속에 현대인들은 살아간다. 아울러 인간 개개인의 파편적 존재 행위에 의존하여 자기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치열한 싸움 속에 모든 사상을 수평적으로 바라보고 수용하는 자세가 아니면 닫힌 사람으로 취급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울러 성경적 가치는 점점 새로 오는 세대의 사람들에겐 크리스천만의 게토화(ghettoization)된 지식으로 남을 위험에 처해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은, 위기감을 갖는다.

그런 면에서 신앙인에게 무장되고 준비 되어야 할 신앙적 지성이 무엇일지 다시금 도전으로 와져야 하지 않을까? 지성보단 감성의 세계에 머무르며, 감성적 위안과 만족이 신앙 행위의 절대치와 같은 착각 속에 살아가기 쉽지 않을까? 아울러 신앙 행위가 교회에 가서 보는 예배 행위로 단순히 위안의 도피처로 변질되지 않았는지, 스스로 거룩한 자성이 필요하다고 여겨본다. 그런 면에서 신앙이란 단순히 편안을 느끼는 감정, 죄책감에 대한 해방감, 그리곤 종교적 의무에 대한 책임감을 상쇄할 만한 교회 내 봉사나 그 어떤 선행으로 신앙적 의무를 수행한 이기성을 분별하지 못하는 우매성을 깨지 못한다면 역시 교만에 지배당할까 심히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다시 성경을 근간으로 한 신앙적 지성에 대한 가치의 재발견과 추구가 더욱 요청되어지지 않을지, 포스트모던 타임(Post-modern Time)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겐 더없이 와 닿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신앙 행위가 진정으로 어느 시대 한 정점에 머무르는 가치가 아니라 영원을 향하고 영원 속에 머무르는 공간이기에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그분의 지혜를 통한 신앙적 앎의 성숙으로, 주어진 무대 속에 거룩히 승화된 연기가 신자라면 늘 요청 받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