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윤치호 선생의 에모리 대학 유학
1891-1893년까지 Oxford College of Emory University(주 : 옥스퍼드 대학은 에모리 대학의 전신으로 조지아 주의 옥스퍼드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에모리 대학 분교로 되어 있다.)에서 공부한 윤치호 선생은 조지아 땅을 밟은 최초의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윤치호 선생은 어떻게 조지아 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윤치호 선생의 일생을 간단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1864년 한국에서 출생한 윤치호 선생은 신사유람담의 일원인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활동하였고, 감리교의 선교사로서 한국의 초기 감리교 선교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윤웅렬씨는 무관이었는데, 나중에 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윤치호 선생은 1881-1882년까지 일본을 여행하면서 일본의 현대 기술과 산업 시설을 시찰하였다.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윤치호 선생은 미국 공사 푸트를 대동하고 그의 통역관이라는 직책을 갖고 들어왔다.

서울의 집으로 돌아온 윤치호 선생은 미국 공사 푸트(Foote)의 통역관으로 일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 외무부(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서기(주사 chusa)로 임명되어 일하였다.(1983-1985년). 윤치호 선생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당시 진보주의자들(개화파 인사들)과 합류하여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진보주의자들이 우정국(지금의 우체국) 설립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연회를 계기로 보수주의자(수구파 인사) 몇 명을 제거하고 정변(갑신정변)을 일으켰는데, 3일 만에 청군의 출동으로 실패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옥균을 비롯하여 정변의 주역들은 일본으로 도망하였고, 윤치호 선생은 미국 대사관으로 간신히 피신하였다. 1885년 신변이 위험해진 윤치호 선생은 미국 공사 푸트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도피하였다.

▲초대 주한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 ⓒ좌옹 윤치호 문화사업회
1885년 윤치호 선생은 상하이의 중서서원에 등록했다. 이 중서서원은 감리교 계통의 학교로 알렌 박사가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서 윤치호 선생은 기독교도로 개종하였고 마침내 1887년 4월 3일 감리교단의 신도로서 세례를 받았다.

1888년 윤치호 선생은 영 알렌 박사의 주선으로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에 있는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에 신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으로 입학했다. 이곳에서 3년간 공부하던 그는 1891년 조지아 주 카빙턴(Covington)에 있는 옥스퍼드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그리하여 윤치호 선생은 조지아 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로써 윤치호 선생은 애틀랜타 한인 이민 1호가 된 셈이다. 윤치호 선생은 에모리 대학에서 1891년에서 1893년까지 공부하였다.

에모리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윤치호 선생은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여름 방학이면 농촌의 교회들을 방문해 기금을 모았다. 그런데 그는 그가 쓰고 남은 돈 2백 달러를 에모리 대학 총장 캔들러에게 한국의 선교사업을 시작해 달라고 맡겼다. 공부를 하면서도 늘 한국의 정세에 관심을 기울이던 윤치호 선생은 정치적인 문제로 아직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상하이 중서서원에 가서 교사로 일하였다.(1893-1895년) 상하이에 있는 동안 윤치호 선생은 중국인 여학생 모추승과 결혼하였다.

1895년 한국 정세가 안정되었다는 것을 알고 윤치호 선생은 귀국하게 되었다. 정치적 환경의 변화로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간 윤치호 선생은 즉각 총리 대신(Premier) 비서관으로 임명되었고, 6개월 후에 학부협판으로 승리하였으며, 다시 외부협판으로 임명되었다.(1895-1896). 그가 외부협판으로 제직하고 있는 동안에 윤치호 선생은 감리교가 한국에 선교할 수 있도록 협조하였다.

윤치호 선생은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서재필에 이어 독립협회의 회장으로서 그리고 독립신문의 편집장으로서 활동하였다.(1896-1898년) 그의 이러한 정치적 활동 때문에 그는 정부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고, 정부는 그를 지방관으로 보내 버렸다. 그래서 윤치호 선생은 원산, 진남포, 천안 등지에서 근무하였다.(1899-1904) 1904년에 서울로 돌아와 윤치호 선생은 외부대신서리로 근무하였다.(1904-1906년)

이 무렵 윤치호 선생은 그의 인생에 있어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정치적인 활동을 포기하고 기독교 사업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래서 윤치호 선생은 1906년 개성 송도에 한영서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윤치호 선생은 농업과 공업에 관한 서구식 교육을 통하여 한국이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송도에 설립한 이 한영서원은 이러한 신념에 의하여 설립한 산업학교였다.

그러나 윤치호 선생은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1911년부터 1915년까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일제는 데라우치 일본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날조하여 윤치호, 양기탁 등 신민회 간부 105인을 주모자로 구속하였던 것이다. 윤치호 선생은 1915년 석방되자 개성 송도에서 그의 일을 지속적으로 해 나갔고, 한국 YMCA를 설립하는데 협조하였다.(1915-1925년) 윤치호 선생은 1925년 모든 사회 활동에서 물러났고, 1945년 12월 6일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