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음악>
루터는 음악이 신학 다음으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하였다. 음악은 신학과 닮은 점이 많은데 특히 영혼을 고치고 영들을 소생시키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음악이 없으면 인간은 목석과 마찬가지이지만 음악이 있으면 마귀를 멀리 보낼 수 있다. 루터는 이것을 영적인 고통 가운데에서 직접 경험하였다. “음악은 나를 자주 소생시켜 주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그러나 음악을 멸시하는 ‘열광주의자들’은 음악의 이 유익을 몰랐다. 그들은 오르간을 마귀의 유산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루터는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음악은 또한 마귀를 몰아내주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음악은 사람의 모든 분노, 음란, 교만, 그리고 모든 악을 잊게 해준다. 나는 음악을 신학 다음으로 중요하게 보며 무한히 아낀다.”고 하였다.
한편 루터는 카톨릭교회에서 한정된 이들에 의해서만 사용되오던 찬송을 만인의 소유물로 돌려주었다. 이전의 그레고리안 찬트에서는 예배시 회중은 잠잠히 있고 성가대의 전문가들만이 송영을 번갈아 불렀다.

그러나 루터는 일반 회중도 찬송을 부를 수 있게 예배 의식을 개혁하였으며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비롯하여 많은 찬송곡을 작사, 작곡 하였다. 그의 곡들은 ‘코랄’이라는 장르로 자리 잡는다. 그는 자신의 ‘작고 못생긴 목소리’를 불평했지만 플루트와 류트를 연주하는 능수능란한 음악가였다.루터는 사람을 움직이는 찬송의 능력을 믿었다. 찬송은 보통 사람들뿐만 아니라 배운 이들에게도 성경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가장이 가족에게 찬송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요한 세바스찬 바하>
노래하는 신학자였던 루터를 닮은 그의 후예들 중에는 많은 음악가들이 태어나 불후의 곡들을 후대에 남겼다. 이들은 복음의 소식을 하나님께서 주신 음악으로 해석하면서 그의 영광을 찬양하였다.우리는 루터의 음악적 동료였던 요한 발터를 기억해야 한다. 그는 종교개혁 당시 루터 진영의 음악을 가다듬으며 첫번째 찬송가집을 편집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200년 동안의 유럽 음악의 역사는 루터교 음악의 역사라고 말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작곡가와 오르간 연주가들이 루터교회에서 배출된다.즉, 수난곡의 대가 하인리히 쉬츠와 함께 3S로 불리는 샤인, 샤이트를 비롯하여, 북스테후데, 파헬벨 등의 오르간 음악가, 크뤼거, 네안더 같은 찬송가 작가들이 그들이다.

특히 루터교 음악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대표적인 작곡가로 요한 세바스찬 바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서양 음악의 역사를 BC, AD로 나누었다고 표현되는 그는 루터교 집안 출신의 헨델과 함께 바로크를 대표하는 음악가이면서, 오페라를 제외한 모텟, 오라토리오, 수난곡, 오르간곡, 칸타타 등 모든 음악 장르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다. ‘마태수난곡’과 ‘b단조 미사’ 등 그의 곡들은 후대 모든 작곡자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의 천재성은 유태인이면서 루터교인이었던 펠릭스 멘델스존에 의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 그가 묻혀있던 바하의 ‘마태수난곡’을 1829년 베를린에서 초연함으로써 바하는 서양 음악계에서 복권 되었고 1850년에는 바하협회가 창립된다. 라이프찌히의 성 토마스 교회당. 바하는 27년 동안 이 교회의 음악 감독으로 일하면서 300여 곡의 예배용 칸타타 등 많은 교회 음악을 작곡한다.


<루터 교회의 시작과 발전>
루터 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에 따라 세워진 교회이다. 루터는 본래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교회 안에 들어온 새로운 것들을 정화하고 초대 교회의 순수한 신앙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종교개혁에 대한 반(反)종교개혁의 운동을 벌이면서 스스로를 분리시켜 갔다.‘루터란’이라는 명칭은 개혁자를 비판하는 이들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말로 사용하였는데, 나중에는 이 말이 루터교인들 스스로 자신들에 대해 부르는 자랑스런 이름으로 고정되었다.그 이후 루터교회는 북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로 퍼지게 된다. 루터 교회는 개혁자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나 처음부터 그런것은 아니었다. 루터 자신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따라 불려지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더이상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그래서 우리들을 루터교인이라 부르지 말고 그리스도인이라 불러 달라고 하였다. 루터가 무엇인가? 내 교리는 확실히 나의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지도 않았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자기들을 바울파 혹은 베드로파라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도대체 이 약하고 추한 시체 같은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자녀들에게 나의 쓸모없는이름에서 유래한 이름을 붙이겠는가? 아니, 안 된다. 나의 친구들이여, 모든 파당의 이름을 제해 버리고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지고 있는 그 분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이라 불러 주시오.

”루터교는 온 세상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임을 믿는다.“교회에 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하나의 거룩한 교회는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이 교회는 복음이 순수하게 설교되고 성례전이 바르게 집행되는 성도의 회중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참 일치를 위해서 복음의 가르침과 성례전의 집행에 대하여 일치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인간의 전통, 곧 인간이 만든 의식이나 예식이 어디서나 같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엡 4:5,6)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아우구스불그 신앙고백서, 제7조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공격(1517)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카톨릭 교회의 기반을 강타하였다. 라이프찌히 논쟁(1519)은 엑크가 루터로부터 교회회의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교황이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다는 견해를 끌어낸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 결과 루터는 이단자라는 낙인이 찍힌 후 파문의 위협을 받다가, 그후 공개적으로 교황의 교서를 불사르자 파문 당하였다(1521).

신앙적 갈등은 곧 정치적 상황의 전개와 뒤얽히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는 보름스 국회(1521)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하지 않은 루터를 제국으로부터 추방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사상은 점점 더 퍼져 나갔다. 유럽내의 정치적 상황이 이 운동을 억압하기에는 불리하였기 때문에 황제는 아우그스부르크 제국회의(1530)에서 협상을 통한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이 때 루터란 측에서 제출한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그들의 가르침과 보편 교회의 신앙 사이에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였으나 황제는 거부하였다. 그리고 보름스 칙령이 원상복귀 되었다.

1531년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은 황제의 칙령의 시행을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슈말칼트 동맹을 체결했다. 이 동맹은 16년 뒤인 1547년에 패배하였으나 이 패배는 외교의 명수인 작센의 모리스가 프로테스탄트측으로 선회했을때 만회되었다.

프로테스탄트측에 종교화의(和議)를 인정한 파소조약(1552)에 이어 아우그스부르크 평화조약(1555)은 카톨릭과 루터교가 동등한 법적 권한을 갖게 하였다. 여기서 한 행정 구역을 다스리는 제후의 종교가 루터교인가, 카톨릭인가에 따라 그 지역의 종교가 결정되는 지역별 종교의 자유 (cuius regio, eius religio)의 원칙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전 교회를 개혁의 대상으로 삼았던 루터와 그 후예들의 목표는 지역교회 단위의 개혁으로 한정되게 되었다. 한편 아우그스부르크 평화협정은 루터교외의 다른 종파에는 해당이 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30년전쟁’(1618-48)이 끝나고 웨스트팔리아 평화협정에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1521년 복음적 설교가, 그리고 그와 더불어 종교개혁이 보름스의 마그뉴스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보름스 국회가 열렸을 때 그 도시를 찾아 온 수많은 사람들은 ‘루터란주의’가 커가고 있는 현상들 중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