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호닷의 집시마을을 방문하고 난 후에 참으로 열악한 환경에 있는 집시 마을과 집시들의 모습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와 같은 나라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는데 그 지역에는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동일하게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는데 반하여 루마니아(트랜실바니아에 제한), 우크라이나(갑바도얀 지역에 제한)에 있는 집시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백인인데 반하여 헝가리 문화권의 집시들은 실향민에다 그 지역에서 또한 소수 민족으로 절대적, 상대적으로 빈곤한 가운데 있는 민족이다.

루마니아의 호닷 지역을 방문하고 난 후에 2005년 2월, 미국 PCUSA의 최 정진 목사님께서 동유럽 집시선교의 현장을 방문하셨다. 그때에 루마니아의 집시들의 형편에 대해서 최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당장 그곳을 한 번 방문하자고 하셔서 함께 루마니아를 방문하였다. 호닷 마을에 이르자 우리는 아주 오래 되어 보이는 시청(동사무소의 규모)으로 발걸음을 향하였다. 시청에 들어서는데 입구에 누군가가 서 있어서 호닷 마을을 집시선교 때문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시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자신이 시장이라고 하였다.

그분은 우리를 초라하기 그지없는 시장실로 안내하였다. 말이 시장실이지 호마이카 책상과 책상 위에는 허름한 컴퓨터 한 대, 낡은 책장과 오랜 세월 동안 사용한 흔적이 있는 그을린 벽난로가 전부였다. 시장실에 들어선 우리에게 시장은 자신이 발록 페렌치(Balog Ferenc)이며 지난 연말에 새로이 시장으로 선출이 되었다고 하였다. 첫 인상이 나이는 40대 초반의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하고 진솔해 보였다. 이어서 페렌치 시장과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시장은 헝가리계 루마니아 인이어서 나와는 헝가리어로, 미국 최 목사님과는 두 분 모두 독일어로 유창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전혀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최 정진 목사님은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셨고 페렌치 시장 역시 어릴 적부터 독일어를 배웠기에 만남이 그리 길지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세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수가 있었다. 최 목사님은 “대학 때에 배웠던 독일어를 이렇게 선교현장에서 써 먹을 줄은 몰랐다”고 하시면서 아주 흡족해 하셨다.

이어서 시정(市政)과 선교사역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페렌치 시장 역시 침례교 목회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가운데 있는 호닷 마을에서 목회자로 할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어 이렇게 행정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앞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행정을 펼치겠다는 다짐도 들었다. 이어서 호닷 마을을 비롯한 네 군데의 마을의 형편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

언젠가 셀림 필립으로부터 페렌치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생각났다. 필립은 호닷의 여러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침례교 목회자가 한 분 있는데 이 지역에 있는 세 군데의 침례교회에서 목회사역을 하고 있지만 모든 교회들이 재정적으로 자립은커녕 목회자의 사례비조차 드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여 이 목회자는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지 못하는 대신에 사모님이 일 년에 반은 독일로 가서 병원 간호사로 일을 하여 가계를 꾸며나간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었던 그분이 바로 오늘 만난 시장이었던 것이다. 페렌치 시장에게 전에 셀림 필립으로부터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더니 ”그러느냐“고 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헝가리계 침례교 목회자인 페렌치 시장, 미국 PCUSA의 최 목사님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 목회자인 나와 함께 세 명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교계, 선교사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많이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최 목사님은 호닷의 어려운 환경가운데 있는 집시들을 위해서 의미 있는 집시선교 사역을 함께 도모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먼저 페렌치 시장의 이야기로는 호닷 마을에서 집시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인데 집시들에 교육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하여도 그들에게 그리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교육을 받든 받지 않던 그리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집시 부모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보다는 노동력의 한 방편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페렌치 시장은 최 목사님께 앞으로의 시에서 집시들을 위한 사회 복지 및 교육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페렌치 시장은 시장이 되고 난 후에 깊이 생각했던 것이었는지 호닷 마을에 사회 복지 센터 건축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최 목사님은 사회 복지 센터가 건축이 되고 나면 그곳에 아이들을 위한 “방과후 학교”를 제안하였다. 이렇게 하여 호닷에 사회 복지 및 선교사역을 위한 선교센터 건축과 운영 방안의 밑그림이 쉽게 그려졌다.

페렌치 시장과의 첫 만남에서 루마니아에서 이루어질 선교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선교사역이 시작되면 선교사역의 범위도 넓어지고 한 해에 얼마나 많은 선교비를 보조해야 하는지 등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맴 돌았다. 그러나 최 목사님은 루마니아의 어려운 집시들을 위해서 선교사역을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감격해 하고 계셨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우리 집시선교 사역을 예비하셨다”고 하였다. 그래서 운전석 옆에서 앉아계신 최 목사님께 루마니아의 시장과의 약속을 너무 쉽게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최 목사님은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감당하면 하나님께서 더 큰 일을 감당하도록 함께 하신다”라고 하시면서 걱정을 하고 있는 나의 속내를 읽으셨는지 “믿음이 없는 놈!”이라고 핀잔을 주셨다. 나는 최 목사님 앞에서 대놓고는 말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믿음이 좋으시면 책임지시고 선교비 모금해 주세요!”하는 마음이었다.

루마니아에서 돌아온 후에 최 목사님은 루마니아에서 이루어 질 사역에 대해서 페렌치 시장과 많은 대화가 있었다. 나 또한 틈틈이 시간을 내어서 루마니아를 방문하곤 하였다. 드디어 호닷 마을에 집시선교 사역을 위한 청사진이 나왔다. 우선 루마니아 정부로부터 국비 보조를 받고 일정 부분은 유럽 교회 특별히 독일교회, 네덜란드 교회 등에 요청하여 건축비를 모금하는 방법으로 2층 건물을 짓는 설계도가 나왔다. 1층에는 게스트 룸과 치과 병원으로, 2층에는 “방과후 학교”를 위한 교실, 주방 그리고 식당 등의 건평 약 150여 평의 상당한 수준의 건물 규모였다. 이렇게 하여 선교센터 건물이 지어지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교사역의 프로그램 즉 가난으로 인해서 점심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일, 신앙교육 그리고 학교에서 부진한 학업을 돕는 프로그램 등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선교센터 건축을 목표로 일이 신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루마니아의 집시선교 동역자인 침례교 목회자인 발록 페렌치 목사님은 목회자로 행정 일선에 나서는 일이 쉽지 않은 결단이었겠지만 세상 속에서 교회의 사명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게한 목사님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부자들의 눈치를 보거나 비위를 맞추는 목회자가 아닌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특별히 집시민족을 위해서 늘 관심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신의 행정을 소신 있게 펼치는 마음이 따뜻한 목회자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