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란타를 포함하여 많은 이민 생활하시는 분들의 특징은 쉽게 상처를 잘 받는다는 것입니다.
상처도 잘주고 상처도 잘 받습니다. 상처받지 않고 살면 좋을텐데 그게 어려운 모양입니다.

그런데 상처를 왜 받는 줄 아십니까? 상처를 준 사람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에 받습니다.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 줄 압니다.
지나가는 어린아이나 임종직전의 환자가 하는 말에는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대하고 믿었던 사람들의 말에 종종 상처를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상처를 받기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이라 사람은 정신과 의사이자 유태인이었습니다. 프로이드 심리학을 배웠기에 어렸을 때의 사건들이 인간의 성격과 성품을 결정지어 개인의 삶 전체를 기본적으로 지배한다는 프로이드 학설을 신봉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치 수용소에 갇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고문과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그의 부모와 형제와 부인은 수용소에서 죽거나 가스실로 보내어졌습니다. 여동생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몰살당한 것입니다. 자신도 언제 가스실로 보내질지, 아니면 죽은 이들의 시체와 재를 치우는 구원된 사람 중에 기일지 일순간도 전혀 모른 체 고문과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홀로 벌거 벗기워 작은 감방에 갇혀 있을 때 어떠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나치들도 빼앗을 수 없는 명명한 상태를 자각하였습니다.

자아의식(Self consciousness)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신의 아이덴티티는 그대로지만 수용소의 모든 일로부터 영향받고 안 받고의 여부는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극과 자극에 대한 반응 사이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동물도 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능력입니다.

엘리노아 루즈벨트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당신의 동의 없이 당신에게 고통을 가할 수 없다. No one can hurt you without your consent. 인도를 영국에서 독립시킨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우리의 자존을 빼앗을 수 없다. They cannot take away our self respect if we do not give it to them.

상처받고 안받고는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사람들의 평판이나 인정에 신경 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존재의 근거를 두는 사람은 상처받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하나님께 두고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바보라고 해도 무시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존귀한 자로, 택한 족속으로 인정하여 주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상처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단지 참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과 시선에서 자유롭고 늘 당당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무관심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의미와 가치를 그들의 잣대로 재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 우리가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을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우리의 최선을 다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가 불완전하고 어려운 이민 사회에서 당당하게 살수 있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 안에서 올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상처받지 맙시다. 또 상처받지 않기로 결심합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