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필립과 올가와의 만남
지금은 중국 남부지방의 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필립 셀림(Philip Selim)이라는 이집트계 미국인 친구가 있다. 그는 사보 다니엘 목사님의 오랜 친구였는데 오래 전에 헝가리를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면서 올가(Olga)라는 이름을 가진 그의 아내와 우리 가족은 곧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는 루마니아 사뚜 마레주 인근에 있는 호닷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영어와 컴퓨터 등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어느 선교단체에 속한 선교사도 아니고 동유럽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난 후에 처음에는 슬로바키아로 들어와서 몇 년 동안 영어를 가르쳤고 루마니아로 옮겨와 현지 자매와 결혼을 하여 살면서 지역의 백인 아이들 또한 집시 아이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서 컴퓨터도 가르치고 영어도 가르치는 등 딱히 선교사역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아내인 올가는 헝가리계 루마니아 인이었는데 늘 기도하고 말씀을 즐겨 묵상하는 믿음이 좋은 자매였다. 그 또한 자신이 농사를 지어 밭에서 나오는 야채 등을 가난한 이웃들에 나눠주고 남편이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함께 돕는 그러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필립과 올가는 종종 헝가리를 방문하여 다니엘 목사님과 우리를 찾아와서 교제를 나누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집시선교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루마니아의 집시들의 형편이나 집시선교에 대한 정보들을 늘 전해주곤 하였는데 그의 이야기로는 루마니아 집시들의 형편은 헝가리의 집시들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시 아이들은 끼니조차 거를 때가 많고 학교에 다니는 집시 아이들은 가난으로 인해서 학교에서 점심을 늘 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기회를 만들어 루마니아를 꼭 한 번 방문해 주기를 종종 요청하였다.

쉽지 않았던 루마니아 국경통과
2004년 초겨울, 필립에게 언젠가는 기회가 되어지면 방문하겠다는 약속과 집시들을 보기 위해서 루마니아를 방문하게 되었다. 샤로스파탁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여 2시간 정도 남동쪽으로 차를 운전을 하여 가니까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국경이 나왔다. 헝가리의 세관를 지나서 루마니아의 세관으로 들어가는데 많은 차들이 줄을 지어서 서 있었다. 지금은 헝가리나 루마니아 역시 EU(유럽 연합)에 가입하여 출입국이 수월해졌지만 그 당시에는 줄을 지어서 기다리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루마니아 세관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는 세관원들 그리고 군인들이 서있었는데 세관 분위기가 살벌하였다. 이윽고 나의 차례가 되어서 나의 여권과 차량등록증을 세관원에게 넘겨주었는데 여권을 받아든 세관원이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면서 어느 코리아냐고 묻기에 “사우스 코리아”라고 하면서 서울로부터 왔다고 하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했고 2002년에는 월드컵을 개최하였기에 사우스 코리아는 알고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 “서울 코리아”라고 대답을 하였던 것이다.

여권을 받아든 세관원은 차를 한 쪽에 세워두고 기다리라고 하고는 세관으로 들어갔는데 30분이 지나도 나오지를 않았다. 기다리던 중에 세관 초소 안을 들여다보니까 보니까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아마도 한국인에게 무비자로 입국이 가능한지 묻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신경질을 내면서 내 여권을 자기들끼리 책상 위에다 집어던지곤 하였다. 이미 샤로스파탁에서도 슬로바키아를 종종 넘어가곤 하였는데 그들 역시 한국인에게 무비자인지 늘 전화를 하는 것을 보곤 하였는데 루마니아에서도 같은 상황을 맞게 된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루마니아의 세관원이 나왔는데 그리 밝지 못한 모습으로 나에게 여권을 전해 주었다. 루마니아의 첫 입국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루마니아의 집시들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첫 발을 딛게 되었다.

루마니아 호닷의 집시방문
루마니아의 호닷으로 가는 길에 사뚜마레라는 도시를 통과하게 되었는데 도시에 들어서 보니까 헝가리의 옛 잃어버린 지역이어서인지 헝가리와 별반 다름은 없었는데 도시는 온통 회색이었고 시골 마을은 가난으로 인하여 옹색하기가 그지없었다. 헝가리에서는 이 지역을 “트래실베니아”라고 부르는데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에 헝가리의 영토를 주변 일곱 나라에 분할을 당하게 되는데 루마니아에게는 헝가리의 국경에서 약 400Km 내륙까지 들어간다고 하니 엄청난 지역의 땅을 루마니아에 빼앗기게 된 것이다. 또한 차우세스코 정권 아래에서는 이 지역에 살고 있는 헝가리계 사람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이 지역에 집시 또한 많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드디어 루마니아의 국경도시인 사뿌마레를 지나서 한 시간 정도 운전을 해서 들어가니까 호닷(Hodad)이라는 동네가 나왔다. 호닷 역시 가난하고 초라한 헝가리의 어느 동네와 별반 다름이 없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미리 연락을 해서였는지 필립과 그의 아내 올가가 우리를 많이 기다렸다고 하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올가가 준비한 점심을 맛있게 먹고서는 집시 마을을 소개해 주었다. 호닷에는 두 군데의 집시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을 중심으로 마을 위의 산동네와 마을 아래인 산 아래 동네 두 군데에 집시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다.

먼저 필립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산 아래 있는 집시 마을에 가게 되었는데 가는 길이 미리 내렸던 겨울비에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푹푹 빠지는 그러한 길이었다. 도저히 구두를 신고는 갈 수 없는 그러한 길을 빠져가면서 어렵사리 집시 마을에 들어가 어느 집시 가정에 들어갔는데 집에 창하나 없는 동굴과 같은 그러한 모습이었다. 또한 날씨가 추워져서 집 안에서 장작불을 지피고 있었는데 온통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둔 가운데서 주위를 살펴보니 방이 두개가 있었는데 그곳에 16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이어서 산 위에 위치하고 있는 집시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가는 길 역시 쉽지 않았고 이 동네는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집시 마을보다 더욱 형편이 없어보였다. 폐허가 되어가는 집들은 집이라고 하기보다는 헛간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러한 집안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붕은 허물어져 있어 하늘이 보이고 창문에 유리가 끼워져 있는 집들 역시 볼 수가 없는 그러한 모습이었다. 전기, 전화는 말할 것도 없었고 10가정 정도의 집시 마을 중앙에 펌프가 하나 있는데 모든 마을 주민들이 이 펌프 하나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필립의 의하면 이들 마을 사람들은 국가에서 나오는 약간의 보조금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학교에 아이들이 거의 다니지 않고 다니는 아이들 역시 가난으로 인해서 늘 점심을 걸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참담한 삶을 살아가는 루마니아 집시들
루마니아의 호닷에 있는 집시 마을을 방문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처음 방문한 집시 마을은 충격자체였다. 지금까지도 어려운 사람들을 봐왔지만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은 처음이었고 이러한 환경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이 이상스러울 정도였다.

집시 마을을 방문하고 난 후에 필립과 그의 아내 올가와 함께 하루를 그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그날 늦은 밤까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필립과 올가는 나에게 루마니아의 호닷에 집시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함께 시작을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날 당장에 호닷에 있는 집시들을 위한 어떤 사역을 시작하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었지만 그리 멀지 않은 날에 참담한 삶을 살아가는 루마니아의 집시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모색해 보자고 약속을 하고서는 다음 날 헝가리로 돌아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