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2>

<비텐베르크의 신학>

비텐베르크의 소요 문제를 복음적으로 잘 해결한 루터는 개혁을 위해 같이 힘쓸 팀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이미 보름스 국회 이전부터 진행되었었다. 성서 강해를 하는 동안 루터는 “비텐베르크 신학”의 진리를 동료 교수들에게 확신시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성서를 강조하는 이 학파는 작센 선제후령의 경계를 넘어 바젤, 뉴렘베르크, 스트라스부르크 등지의 인문주의자들에게까지 호소력을 보였다.

이 첫번째 국면에서 같이 활약한 주인공들은 믿기 어려운 팀을 구성하였다. 루터보다 비텐베르크 대학에 먼저 온 칼슈타트는 스콜라학자풍의 교수로 루터의 기본 이념을 실질적인 문제들에 적용시키며 개혁운동을 이끌었으나 그 과격성으로 인해 루터와의 관계가 결렬되었다. 루터보다 훨씬 연하(나이가 어렸던)였던 멜랑히톤은 신학자라기 보다는 고전어 학자였지만 1521년에 루터의 신학을 ‘신학 총론(Loci Communes)’라는 체계적인 형태로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루터가 아직도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교수로 온 부겐하겐은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처음 읽었을 때 그를 역사상 가장 큰 이단자로 여겼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전 세계는 눈이 멀었구나. 진리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뿐이다”고 탄복하게 되었다.

<에라스무스와의 논쟁>

종교개혁은 요원의 불길처럼 제국의 각지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1522년과 1523년을 거치면서 이 운동은 신속히 퍼져나가면서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524년 이후로 농민전쟁과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은 개혁의 속도를 지연시키고 개혁의 일부 추종자들을 떨어져 나가게 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복음주의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계기도 되었다.

루터는 당시 영국의 왕 헨리를 위시하여 많은 대적자들을 갖고 있었다. 이 때 인문주의의 거두인 에라스무스도 루터에게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히라는 압력을 사방으로부터 받고 있었다. 그는 루터와의 논쟁을 시작할 때 교황제, 공의회의 권위, 신앙과 칭의 혹은 성례전 교리 등과 같은 일반적으로 논의되던 주제들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지의 자유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에 대해 루터는 그가 문제의 핵심을 파악했다고 평가했다. “오직 선생만이 문제의 중추를 꿰뚫어 봄으로써 목에 칼을 들이대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에라스무스의 ‘자유 의지론’에 대항하여 루터가 ‘노예 의지론’을 강조한 것은 오로지 그 때에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확실성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에라스무스의 ‘자유 의지론’과 루터의 ‘노예의지론’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기독교관을 나타낸다. 에라스무스는 윤리적인 삶의 개선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에 회의론자의 입장을 취하나 루터는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죽느냐 사느냐에 대한 질문 밖에는 관심이 없다. 확신하지 않으면 어떻게 믿음이 있고 신앙이 있을 수 있는가? “성령은 회의론자가 아니다.”

<개혁의 원리: 하나님의 말씀> The Basis of Reform: the Word of God...

루터의 개혁 운동은 1517년- 20년 사이에, 카톨릭과의 단절 과정을 겪었으나, 한편 개혁 진영 내부 세력들과의 차별화 과정도 겪었다. 먼저 칼슈타트, 뮨처,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개혁운동과의 차별화(1521-25), 다음으로는 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자들과의 차별화(1524-25)과정이 있었다. 이러한 과정들은 종교개혁의 급속한 발전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긴 했으나 다른 한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이 열광주의적 신비주의라든가, 인문주의적 계몽, 그리고 사회정치적 급진주의로 오해되는 것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다.이 과정들에 있어서 공통점은 루터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전통을 성경 위에 올려 놓은 로마 카톨릭에 대해 루터는 ‘성서만으로’를 주장하였고, 열광주의자들의 주관적인 계시이해에 대해서는 성경의 객관적인 말씀을 주장하였으며,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에 대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확실성을 주장하였고, 복음을 정치적 운동에 오용하는 농민들에 대해서 복음은 오직 양심만을 상대한다고 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만 된다면 그 결과는 저절로 온다고 확신하였다.“나는 면죄부와 모든 교황주의자들을 반대하였으나 결코 무력은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썼을 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잠을 자거나 친구들인 립과 암스도르프와 함께 비텐베르크 맥주를 마시는 동안 말씀은 교황을 철저히 무력화 시켰다. 그 어떤 군주나 황제도 그 정도의 해를 입힐 수 없었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말씀이 다 했다.”

<루터와 결혼>
루터는 1525년 6월 13일 결혼을 했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신부는 16년 연하의 전직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1449 - 1552)였다. 루터는 자신이 결혼하려는 목적이 늙으신 아버지에게 손주를 안겨드리기 위해서, 또한 결혼을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설교한 것을 몸소 실천하면서 본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하였다.“나는 내가 가르쳐 온 것을 실천으로 확증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복음으로부터 오는 그렇게 커다란 빛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소심한 이들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행동을 뜻하셨고 또 일으키셨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에 빠졌다’거나 욕정으로 불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

그러나 루터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모두 다 반대를 하였다. 동료들은 루터가 결혼하면 온 세상과 마귀가 웃을 것이며 그 자신이 그동안에 이루어 놓은 일을 다 헛수고로 만들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특히 농민전쟁의 와중에서 그의 결혼선언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종교개혁과 함께 복음이 전파됨으로 해서 사탄이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농민전쟁도 복음을 독재 체재로 왜곡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이라고 보았다. 지금까지 교황은 세속권력에 대한 우위권을 주장하였는데, 이제 농민들은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 복음의 이름으로 칼을 손에 쥐었다.

이렇게 종말이 왔다고 생각했을 때 루터는 다른 세상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바로 결혼하였다. 하나님이 오시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살라고 하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는 결혼을 하는 것이 원수 마귀를 대적하는 한 방법이라 믿었다. “나는 내 결혼식으로 천사들을 웃게 하고, 마귀들을 울게 했다.”

<루터의 가정>
루터와 카타리나의 결혼은 성공적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순수한 사랑이 꽃피었다. “나는 캐티(카타리나의 애칭)를 프랑스와 베네치아와도 바꾸지 않겠다. 왜냐하면 첫째, 하나님이 그녀를 내게, 나를 그녀에게 주셨기 때문이며, 둘째 다른 여자들은 보통 나의 캐티보다 허물이 더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 - 물론 그녀가 허물이 있긴 하지만, 훨씬 더 큰 덕목들이 가려주니까 - 이고, 셋째, 결혼과 관련된 믿음인 신실함과 존경을 그녀가 지키기 때문이다.”

둘은 슬하에 3남 3녀 - 요한네스(1526), 엘리사벳(1527), 막달레나(1529), 말틴(1531), 파울(1533), 마가렛(1534) - 을 두었다. 루터는 첫째 아들은 군인으로, 둘째는 학자를, 셋째는 농부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모두 다르게 되었다. 첫째는 법률가가 되어 나중에 바이마르 궁정의 고문으로 일했고, 둘째는 신학을 공부하였으나 목사로 일하지는 않았고, 셋째는 의학을 공부하여 유명한 의사가 되었다.

한편 루터의 집으로 변한 ‘검은 수도원’에는 그의 가족외에도 다른 이들도 많이 같이 살았다. 카타리나의 결혼하지 않은 이모, 루터 쪽의 부모 잃은 조카와 질녀들도 여럿 있었으며, 가난한 학생들도 하숙하였다. 게다가 개혁자를 만나러 원근각처에서 오는 수많은 손님들로 집이 늘 붐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