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뜻밖에도 소수세력이 다수세력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현상들이 자주 나타났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어떤 목적에 목숨을 건 소수세력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질주하면 끝내는 수적으로 다수인 사회나 민족을 정복해 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 히틀러의 나찌즘이 전체 국민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 극렬한 소수가 독일이라는 자부심 넘치는 민족을 정복했고 학문과 예술에 뛰어난 독일인들을 전쟁과 살인의 무기로 삼아 버린 것이다.

이것은 세계 도처와 민족 속에서 발견되는 공통성이다. 히데끼 도죠와 같은 극렬한 국수주의자들, 러시아의 볼셰비끼 공산주의자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게릴라들이나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즈와 같은 소수세력들이 목숨을 걸고 뭉쳐서 권력을 잡고자 밀어 부칠 때 선량하고 착한 다수의 민중들은 그 폭력과 선동 앞에서 침묵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인권도, 자녀들의 미래도, 한 민족의 존엄성도 철저히 파괴당하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역설 포인트라고 아니할 수 없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사회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소수세력에 속한 방송국 PD나 선동가들이 “미국의 한 여인이 소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려 죽었다”라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일파만파로 보도하며 선동하니, 거기에 춤추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와 온 나라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중이다.

물론 빈부의 격차 속에서 경제적 박탈감 때문에 우울해 하던 일반시민들 중에 촛불을 심리적 출구로 삼아 합세한 사람들도 많고 정부 역시 제대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기대 밖의 졸속 대처를 했지만, 문제는 언제나 극렬한 소수세력에 휘둘리고 마는 다수의 무력함이다. 성숙한 사회와 민족이 되려면 소수의 세력이 야합하여 다수를 움직여 보려고 시도할 때 조용한 다수가 이를 감지하고 지혜롭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극렬한 소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아놀드 토인비 같은 영국의 역사학자는 교회와 복음주의자들을 가리켜 “창조적 소수”라고 지칭한 바 있다. 극렬한 좌파 선동가들의 소수세력을 탓하지만 말고 오히려 복음의 소수세력이 이 땅을 참된 의와 평화로 정복하기 위해 더 뜨거운 열정을 불태워야 하는 것이다. 저들이 극렬하면 복음의 사람들은 더 극성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수의 무례한 소리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복음전파에 목숨을 건 소수세력이 이 땅을 살려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