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켄터키 주에 있는 루이빌 대학에서 사상 처음으로 인공 심장 이식 수술을 시도했다. 환자는 59세 난 로버트 툴스라는 전직 교사였는데, 심장병 말기로서 그냥 두면 한달 이내에 죽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심장을 이식 받고, 51일이 지난 오늘까지 죽지 않고 생존해 있다. 원래 의사가 기대한 것은 한달 정도의 생명 연장이었는데 그 이상의 날들을 살게 된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로버트 툴스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감격과 흥분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때때로 산다는 것을 당연시 하지만 이런 사람에게는 살아 숨쉰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요, 선물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요즈음 같이 전염병과 불의의 사고로 수백 명씩 죽어가는 현실을 감안하면 매일의 생존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지 알 수가 없다.

며칠 전에는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던 한 집사님의 장례 예배를 집례했다. 목회를 하면서 장례식을 인도할 기회가 수없이 많았지만, 이번 장례 예배는 무언가 감회가 다른 것이 있었다. 그 분은 한 때 대기업의 지사장을 지내며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던 사람이었다. 50대 중반의 한국 남자들이 대다수 그랬듯이, 조국 현대화의 최전선에서 회사를 위해서 자신의 몸 아끼지 않고 뛰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회사로부터 버림받고 지난 10여년 간을 충격과 방황 속에 살아왔다. 한 때의 기백도, 청춘도 접어둔 채 관 속에 누워 있는 그를 보며 인생 허무의 실체를 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분의 나이가 나와 같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아직은 더 살아야 할 창창한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동년배 사람들 중에도 세상을 떠나는구나 하는 착잡한 마음과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의 책임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냥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산다고 할 순 없을진대, 무엇을 남겨야 하나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닌가? 하나님이 빌려주신 시간이요, 그의 소유다. 그렇다면 그의 목적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뚜렷한 목적이나 소신 없이 인생을 살아 갈 때가 많다.

인도의 시성 타골은 “죽음의 신이 당신을 노크할 때 당신은 당신의 생명 광주리에 무엇을 남겨 놓았는가를 생각하라”고 했는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남기며 갈까? 특별히 목회자로서 무엇을 남겨야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아니할까? 윌로우 크릭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빌 하이벨스는 자신이 후일 사람들에게 “교회 성장 전략가나 위대한 교회 건설자로 기억되기 보다는 가슴과 사랑의 사람(a man of heart and compassion)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밝힌 적이 있다. 위대한 업적 보다는 삶의 향기와 감동을 남기고 싶다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성취만을 인생의 열매로 생각하는 한 참된 가치를 남기며 살 수 없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라. 그가 이 땅의 삶을 마칠 때 남긴 것이 무엇인가? 큰 조직이나 건물을 남긴 것도 아니고, 초대형 교회나 재력을 남긴 것도 아니다. 덩그러니 십자가 한 개 남기고 가셨다. 그럼에도 그 십자가가 미친 영향이 얼마나 엄청 났는가! 역사의 방향을 바꾸고 사람들에게 살아야 할 가치와 생명의 소망을 안겨 주었다. 이런 것이 참된 열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헛된 영광을 위해 살 때가 너무 많다. 그것이 가치가 아니라고 역설하면서도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열심히 간다. 생의 마지막 날이 왔을 때 허무해 할 것을 뻔히 알면서 말이다. 카트린 제나베가 고백한 것처럼, 삶은 하나의 선물이다. 이것을 분명히 할 때 욕망의 덫에 걸리지 않고 바르게 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