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출 4:24~26)'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 ‘내 백성을 불러내라’는 사명을 맡았다. 40년 미디안 광야 생활을 마치고 이집트로 향하는 거룩한 소명의 길에서 어쩐 일인지 하나님은 모세의 생명을 위협하신다. 그 이유는 그 아내 십보라의 행동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십보라는 남편의 위기가 자신의 불순종 때문임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아들 게르솜에게 할례를 행했다. 남편이 유대인임을 알면서도 십보라는 아들에게 할례주기를 반대해 온 것 같다. 그러나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또한 남편의 이집트 선교사역을 처음부터 내켜하지 않았을 십보라의 헌신도 함께 받으시기 원하셨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모세의 백이십년’이라는 설교에서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이드로의 들잇사위 되니 대장부의 수치로다. 아들 낳아 게르솜(이방인의 손노릇)이라 부르니 당당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도 할례를 못하였다. 이것이 엄처 십보라의 제재라면 망명객의 서름을 언제나 풀어볼까?”

아내는 언제나 신실한 하나님의 딸이었고, 성도였다. 교제하던 남자친구가 어느 순간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면서 얼떨결에 사모가 된 뒤에도 그 자세는 변함없었다. 힘껏 교회도 섬기며 남편을 도아 왔지만 몇 해 전 시애틀에 교회를 개척하고 선교하기 위해 자동차로 열 이틀간을 달려올 때까지도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시애틀로 오는 도중 샌프란시스코에서 머물며 참석한 사모들만의 모임에서 아내는 ‘사모로의 부르심’을 들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딸이자 교회의 성도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 때 아내는 사모로 태어났다.

십보라는 이집트에 가기 전에 이스라엘의 목자의 아내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고 그에 합당한 결단이 있어야 했듯이, 오늘 이 땅의 사모들도 사모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남편만큼 어려운 길이겠지만, 후에 받을 칭찬도 그만큼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