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9월 개교해 올해로 설립 80주년을 맞은 고려신학대학원이 신학교 설립의 역사적 뿌리와 신학적 정체성을 재조명하는 기념강좌를 열었다. 29일 충남 천안시 소재 고려신학대학원 진행된 이번 강좌에서는 해방 직후 고려신학교 태동을 이끌었던 주남선, 한상동, 박윤선, 손양원 목사 등 4대 핵심 인물의 사역과 신앙을 교회사적 맥락에서 다각도로 검토하고, 오늘날 교회가 계승해야 할 과제를 집중 논의했다. 

'역사적 상황에서 바라본 주남선'을 주제로 발제한 이성호 교수(교회사)는 주남선 목사가 고려신학교 설립 당시 지녔던 독보적인 위상을 환기했다. 이성호 교수는 "주남선 목사는 한상동 목사와 함께 고려신학교를 설립한 두 기초석 중 한 분이며, 박윤선 목사는 이 터 위에 건물을 세운 것"이라며 "제1회 고려신학교 졸업사진(1947년) 정중앙에 주 목사가 위치하고 주변 인물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구도는 초기 역사에서 주 목사가 차지한 실질적 위상을 명확히 보여준다"라고 했다. 

이 교수는 주 목사의 성장과 사역 배경을 살피며 "호주 선교사 맹호은(F. J. L. MacRae)에게 세례를 받은 주 목사는 권서인(매서인)과 조사로 헌신하며 거창 지역 복음화와 거창교회 설립의 산증인이 됐다"라며 "1919년 3·1 만세운동 주도와 만주 군정서 군자금 모금으로 1년여간 옥고를 치르는 등 투철한 민족정신을 지녔고, 이는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단호히 거부하고 1940년부터 해방 때까지 평양형무소에서 모진 고초를 견뎌내는 저력이 됐다"라고 했다. 

해방 후 주 목사의 행보에 대해 이 교수는 "한상동 목사가 1946년 4월 월남해 신학교 설립을 제안했을 때, 당시 경남노회장이자 남쪽 출옥 성도 중 최고 연장자였던 주남선 목사의 전폭적인 지지와 결단이 없었다면 고려신학교는 순조롭게 출발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주 목사는 고려신학교 초대 이사장(1946~1950년)으로 학교의 기초를 놓으면서도 해방 후 건의된 3·1절 표창을 사양하고 1948년 제헌국회 출마 권유를 단호히 물리치는 등 목회자로서 정치 참여에 선을 긋고 한국전쟁기 공산 치하에서도 교회를 끝까지 지키다 소천했다"라고 했다. 

'고백자 한상동 목사: 한상동과 고신교회 그리고 신학'을 발제한 유해무 교수는 한상동 목사를 단순한 분리주의자나 미화된 순교자가 아닌, 신앙의 증거를 몸으로 감당해낸 교회사적 '고백자(Confessor)'로 규정했다. 

유해무 교수는 "한상동 목사는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가 제1계명을 범하는 중대한 배교임을 꿰뚫어 보고 전국적인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5년간 옥고를 치렀다"라며 "해방 후 일제 부역 교권주의자들이 출옥 성도들의 정당한 회개 및 교회 쇄신안을 거부하고 이들을 축출했음에도 고신 측을 분리주의자로 매도한 것은 독일 나치 부역자들의 억지 논리와 유사하며, 한 목사의 쇄신 노력은 역사적 정당성을 지닌다"라고 했다. 

동시에 유 교수는 한 목사의 사역 후기에 나타난 그늘과 갈등을 객관적으로 분석했다. 유 교수는 "1960년 승동측과의 성급한 합동과 2년 뒤 경건회 광고 형식을 통한 일방적인 고려신학교 복교 선언, 그리고 박윤선 목사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못한 채 결별한 일 등은 '고백자'로서 뼈아픈 한계였다"라며 "이로 인해 환원 과정에서 3분의 1에 달하는 교회를 잃었고, 신학교 직영 과정과 사조이사회 파동, 송상석 목사와의 소송 등으로 교단이 세속 법정 송사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라고 했다. 

이어 유 교수는 현대 교회를 향한 제언으로 "한 목사가 남긴 참된 유산은 SFC 강령이 천명한 웨스트민스터 표준과 개혁신앙의 전수였다"라며 "오늘날 교회가 세속 정치적 구호를 강단에 끌어들이고 치리회를 교권 장악의 장으로 변질시키는 현실을 경계해야 하며, 말씀 선포와 매주일 성찬의 회복, 그리고 성도들을 세상 속의 신학자로 세우는 본질적 개혁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했다. 

'정암 박윤선 목사의 고신을 위한 사역의 특성'을 발표한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남송 석좌교수)는 박윤선 목사가 신학교육 기관 중 고신에서 가장 오랫동안 전력을 다해 사역했음을 강조했다. 

이승구 교수는 "박윤선 목사는 1946년 진해 신학강좌와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서 기초를 도맡았고, 1960년까지 중간의 화란 유학을 제외하고도 13년 이상 고려신학교 교장과 교수로 헌신했다"라며 "초창기 고려신학교의 신학적 터를 닦고 전국 교회가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수용하도록 만든 실질적인 중심축이었다"라고 했다. 

이 교수는 박 목사의 신학 체계를 4가지 핵심 원리로 정리했다. 이 교수는 "박윤선 신학의 첫째는 모든 삶과 신학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하나님 제일주의'이며, 둘째는 반틸과 바빙크의 사상을 소화해 성경 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계시의존사색(啓示依存思索)'"이라며 "셋째는 노회와 총회를 군림하는 상회(上會)가 아니라 평등한 대표들이 모이는 '더 넓은 회의체'로 규정한 성경적 교회정치관이고, 넷째는 일반은총에 기초해 신자가 사회와 문화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어 이 교수는 "박 목사가 고신 시절 집필하기 시작한 주석 작업은 한국 장로교회에 개혁주의를 뿌리내리게 한 결정적 공헌이었다"라며 "주일성수 논쟁 등으로 안타깝게 고신을 떠나야 했으나, 그가 남긴 '신전의식(Coram Deo)'과 교회론적 유산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교권주의와 이원론적 신앙을 극복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표준"이라고 했다. 

'고려신학교와 손양원 목사'를 발제한 정주채 목사(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이사장)는 손양원 목사와 고려신학교 간의 깊은 연대와 함께, 순교신앙을 실천적으로 계승하지 못한 교단의 현실을 짚었다. 

정주채 목사는 "손양원 목사는 신사참배 거부로 5년간 투옥된 뒤 출옥해 한상동·주남선 목사와 함께 한국교회 쇄신운동에 앞장섰던 '손불'이었다"라며 "1946년 신학교 설립기성회 참여는 물론 1948년 고려신학교 총무로 선임되어 애양원교회와 함께 학교 육성과 재정 후원에 동참했던 실질적인 설립 동지였다"라고 했다. 

정 목사는 손 목사의 순교와 장례 경과에 대해 "1950년 9월 28일 여수에서 공산군에 의해 순교했을 당시, 정양순 사모 등 유족의 요청에 따라 고려신학교 교장 박윤선 교수가 설교를 맡고 신학생들이 특송을 부르는 등 장례식 전반을 고신 측 인사들이 주도했다"라며 "손양원의 말씀 중심 신앙, 기도, 나환자 구라 사역,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은 사랑은 고신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라고 했다. 

그러나 정 목사는 순교 이후의 역사적 단절에 대해 반성의 뜻을 밝혔다. 정 목사는 "손 목사가 교단 분열 이전에 순교했다는 이유로 고신 측은 손양원의 유족들이 겪은 극심한 빈곤을 외면했고, 정양순 사모가 개척한 교회조차 제대로 관리·지원하지 못했다"라며 "순교신앙과 코람데오를 표방해온 교단이 정작 가장 고귀한 인적 자산인 손양원을 계승하는 데 지극히 소홀했으며, 이후 교권과 명예 다툼으로 쇠퇴해버린 현실을 자성하고 설립 초기의 희생과 사랑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