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렬 교수와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
이장렬 교수와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
이장렬 교수는 서울대학교(B.M.)를 졸업하고 서든침례신학대학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M. Div.를, 영국 에딘버러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 신약학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2010년부터 캔자스시티에 소재한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 교수로 다양한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Ph.D. 논문을 지도하고 있다. <Christological Rereading of the Shema in Mark's Gospel>, <바디매오 이야기>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높아짐과 낮아짐의 역설

오늘의 본문: 누가복음 22:24-27

24.     제자들 사이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인지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사람의 왕들은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며 권세 부리는 자들은 자칭 '백성들의 은인'이라고 한다.

26.     그러나 너희가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 중 가장 큰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 과 같이 돼야 하고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돼야 한다.

27.     누가 더 높은 사람이냐? 밥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냐, 그를 시중드는 사람이냐? 밥상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더 높지 않으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저자 해설 및 묵상>


24절에 따르면, 제자들의 대화는 이제 자신들의 세속적 욕망과 성공에 대한 주제로 넘어갑니다. 아마 누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누가 더 충성된 제자인지에 대한 토론으로 번지고, 급기야 그들 중 누가 가장 위대한 제자인지에 대한 논의로 연결되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를 지시는데, 그 앞에서 제자들이 자기 중 누가 가장 높은지에 대해 다투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찬 물을 끼얹어도 이렇게 아이스박스 채로 끼얹을 순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며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시는 데(27절 [요13:1-20; 막10:45; 빌2:8 함께 참조]), 제자들은 바벨탑을 쌓아 올렸던 그들(창11:14 참조)처럼 스스로 계속 높아지려고만 합니다. 누가 스승을 배반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던 제자들(눅22:23)은 이제 스승의 일에 관해선 관심조차 없고, 그들 중 누가 더 높은지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눅9:18-20 [병행구: 마16:13-19; 막8:27-29])의 차원이 아닌 스승에 대한 기본적인 인간적 존중과 배려만 있더라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됩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앞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진리를 이미 가르쳐 주셨던 사실(누가복음 9:46-48)에 비추어 본다면, 제자들의 작태가 더욱 한심해 보입니다. 근데 그러한 모습이 혹시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지요?

제자들은 주님이 자기 죽음을 통해 이루실 새 언약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도, 서로 높아지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엉뚱한 짓만 합니다. 새 언약(눅22:19-20)에 전혀 합당치 못한 행동을 해댑니다(엡4:1 이하 비교). 이러한 제자들의 반응은 매우 안타까운 것이지만, 때로 우리 역시 제자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솔직히 더 안타깝습니다.

제자들의 그릇된 반응의 중심에는, 서로 경쟁하고 그 가운데 내가 남보다 더 높아지려는 맘이 존재합니다. 사실 이 세상은 경쟁하여 이긴 자만 살아남는 '적자생존' 논리를 숭배합니다. 특히 한국인은 경쟁이 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치열한 경쟁 가운데 서로를 배려하고 돌보는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져 버리고,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져 그로 인한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성도들 가운데서도 그런 잔혹한 경쟁의식이 쉽사리 제거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직장 동료 간의 경쟁을 넘어, 가족 간의 경쟁, 교인 간의 경쟁, 지역교회 간의 경쟁 등에 우리는 솔직히 이미 익숙합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문제의식마저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진화론에 맞서 목소리를 높이는 크리스천들도, 적자생존의 논리는 찬양하는 듯 보이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1세기나 21세기나 사람은 결국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합니다. 오늘 본문에 그려진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보고, 우리들에게서 그들의 그림자를 봅니다. 

제자들의 이런 한심한 작태를 보시면서도 주님은 사랑으로 타이르시고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괴롭혀 온 이방인 통치자들 - 우상을 숭배하고 귀신을 섬기는 통치자들이 힘의 논리로 백성 위에 군림하고 자신들을 신격화하며 '은인(benefactor)'이라는 공개적 칭송을 받는데 굶주려 있는 이들(25절) - 과 달리, 하나님 나라에서는 높은 자가 도리어 겸손히 섬기고 봉사해야 한다(26절)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대로 말입니다. 자신이 가진 힘으로 힘없는 이들을 학대하고 억누르는 방식으로 다스리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고 귀신을 섬기는 이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우상숭배에 직접 동참하지 않았지만, 우상 숭배자들의 작태, 즉 자기중심적인 방식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었습니다.

'은인'(benefactor)은 헬라어'εὐεργέτης(유에르게테스)'의 번역어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 문화권에서는 통치자들이나 엘리트계층 중에서 사회적으로 큰 공헌을 한 이들을 일컫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은인'은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들을 후원해 주고, 대신 그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은 그 '은인'에게 영예를 돌리고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며 그들의 명성을 홍보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은인'의 '섬김'은 대가를 바라고 베푸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대가를 바라는 섬김 아닌 섬김을 철저히 경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대가와 보상을 바라며 봉사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섬김이 아닙니다!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는 섬김이 아닙니다. 예수의 제자 된 자들의 섬김은 하나님 사랑(경외)과 이웃 사랑(섬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마22:34-40; 막12:28-34; 눅10:25-37 참조). (저자 주①) 

1세기의 로마제국처럼, 21세기의 통치자들과 지도자들은 힘의 논리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배에 가까운 공개적 칭송에 목말라 있습니다. 자신들의 힘, 영향력, 명예, 재력, 그리고 사회적 공헌을 과시함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데 극한 열심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방인(이교)의 논리이지 예수님의 논리가 아닙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대의 방식이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들이 도리어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나라입니다. 가장 높은 자가 가장 낮은 자가 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서 보여주시고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바로 그 본대로 말입니다(막10:45; 빌2:8; 요13:1-20). 

세상에서는 힘 없는 자가 힘 있는 자를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그 정반대입니다.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섬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서 오셔서 하인이 되어 궁극적인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빌2:6-8). 앞서 묵상한 주의 만찬(눅22:14-20)이 상징하는 바대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섬겨주심으로써 속죄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눅22:27 참조, 저자 주②).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역설적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패러다임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패러다임의 복된 전복이 일상이 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세상 패러다임의 전복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이 아니라, 자기 비움과 섬김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이듯 제자들의 한심한 작태가 꼭 그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힘의 논리에 지배받는 세상 패러다임의 유혹과 압력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의 패러다임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매일 푹 담가야 합니다.

<한 줄 기도>

이방인이 추구하는 힘과 돈과 높아짐의 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따르게 하소서.

편집자 주) 본 묵상 내용은 이장렬,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40일간의 묵상』(요단출판사, 2019)에서 발췌하여 개정했습니다. 해당 내용은 요단출판사와 저자의 동의를 얻어 사용합니다. 이 책에 대한 추가 정보는 다음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mall.godpeople.com/?G=9788935017379 


(저자 주①) 이 원고를 가다듬은 2019년 1월 초 뉴욕타임즈는 미국의 한 유명정치인이 지난 16년간 많은 어려움과 도전을 직면하면서도 소속당 및 미국 정계의 지도자로 남아있을 수 있던 비결에 대한 흥미로운 보도를 제공했다. '모금(펀드레이징)에 능하다', '자기에게 충성하는 이들에게 보상을 해 주고 반대하는 이들을 벌한다', '주변의 비판에 동요하지 않는다', '정적과 주저함 없이 맞서 싸운다'는 것 외에 다음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 칭찬하는 데 과감하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높임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성공의 비결이 아니라, 실패의 비결이다!

(저자 주②) 당시 종이 했던 주인의 식사 시중에 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눅22:27)은 주의 만찬 제정(22:14-23)과 하나님 나라의 섬김의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22:24-27)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해 준다. 주의 만찬 본문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때, 현 본문에 언급된 예수님의 '섬김'은 일반적인 봉사를 넘어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찢기신 몸, 즉 그의 대속적 죽음을 가리킨다(막10:45 참조).  

이장렬 교수와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 ①>
이장렬 교수와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 ② >
이장렬 교수와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 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