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명암, photo by 기독일보
종말의 명암, photo by 기독일보

극단적 시한부 종말론, 위기와 불안 역이용하는 세속적 천년왕국주의


선교 활동은 주님의 중요한 명령 중 하나이지만, 이를 빌미로 (자신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수행하면서 지역 사회와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무례한 행위나 생명을 위협하는 소위 도가 넘치는 행동은 정당화 될수는 없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종말론과 선교에 대한 강한 열정이 많은 경우, 이웃에 대한 존중을 간과하는 일들은 이미 많은 곳에서 관찰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코로나 이후 국가적인 차원의 위기대처 상황에서 더욱 강화되고 보완되고 있다는데 문제점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Myriam Revault D'Allone는 극단적 종말에 대한 증폭은 '만물의 종말'의 불안적 개념을 통해 지속적으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특정 질서의 취약성이나 해체는 이러한 두려움을 더욱 강화시킨다고 일갈한 바 있다.

빗나간 종말론, 혹세무민의 반복

빗나간 종말론은 일반 대중들에게 열광 혹은 무관심을 초래한다. 1960~70년대의 입산 운동, 1992년 이장림의 휴거 사건이 대표적이며, 코로나가 성행하면서 극단적 종말론자들은 더 이상 숨어서 활동하지 않는다. 재림마을의 안상준은 2023년 12월 31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주장하고 빗나가자 한동안 잠적한 뒤 최근 유튜버로 대중 앞에 아무일 없다는 듯 영상을 올리고 있으며, 자칭, 새재림 본부 단체는 2028년에 대한민국 남원에서 휴거와 부활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일 등은 기독교에 대한 자세한 분류가 어려운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제공할 뿐이다.

신천지 단체는 영생을 위한 필수 조건인 14만4000명의 교리를 달성하고자 전투적으로 포교할 뿐만 아니라, 교주 이만희가 재림예수라고 주장하고 있고, 코로나19 백신 음모론 등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대한 최바울의 오해가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단사이비 전문가 탁명환 소장 (신흥종교문제연구소)은 특정 종말론 교리를 신앙 체계의 일부로 포함하는 단체를 포함하여 어떤 형태로든 시한부 종말론을 지지하는 단체가 한국에만 약 200개가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기와 종말의 상관관계

종말을 외치는 복음 선교 활동은 종말론적 성경해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그리스도 예수의 선포가 선교운동의 핵심 동력 중 하나로 작용했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위기'와 '종말'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에게 강력한 동기 부여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비판적 사고를 억제하고, 불필요한 공포를 조성하며, 때로는 해로운 행동을 조장할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크리스텐덤  (Neo-Christendom) 사상, 복음의 목적과 수단 정면 배치  

전천년주의 종말론 (Premillennialism)의 경우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으니 복음을 전하는 활동의 긴박성을 강조한다. 지역 복음화, 세계 복음화는 긴급한 사명으로 전환되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20세기에 들어 미국에 이어 최대 선교사 파송국의 호칭은 명예로운 일이지만 본질이 왜곡되어 복음이 수단적 도구가 되는 것은 신자와 불신자들 모두에게 성경을 왜곡하는 중대한 범죄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교회가 종말론에 근거한 복음의 열정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라 인간의 점령 메시지로 전락하는 것은 십자군 전쟁사 (Crusades)에서 볼 수 있었던 기독교의 영욕과 야욕 그 자체다. 

극단적 시한부 종말론은 하나님의 계획과 그분이 세상의 끝을 결정 하실지 알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복음의 전파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암시하는 중요한 표적이지만,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를 특정 지을 수는 없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세속적 천년왕국주의, 기술 결정론자들의 유토피아적 현실도피 추구 

19세기 이후 종교적 천년주의는 기독교 밖에서도 세속적 형태로 변형되어 존속하며, 기독교 내에서도 다양한 해석과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세속적 천년주의는 과학과 이성에 대한 신뢰가 증가하며,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의 꿈을 과학과 기술이 실현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일부 AI (Artificial Intelligence) 열광자들은 유토피아적인 공상에 빠져 있다.  AI가 그 창조자인 우리를 공격하고 인류 문명의 미래에 실질적이고 치명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극단적인 형태의 기술 결정론에 빠져 있기도 하다. Open AI(Chat GPT)에 대한 운명론적이고 디스토피아적인 관점은 기술 자체와는 무관하며 인간 선택 의지에 대한 소수 엘리트들의 협소한 견해로부터 비롯된다. 왜냐하면 기술 결정론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기계는 행위자이고 인간은 수동적인 객체일 뿐이며 창조주의 주권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망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종말 자체에 집착하는 아냐,

교회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주체로 보고, 교회 (성도)의 삶을 그분에 따라 가야 하는 요구를 내포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과 일치하는 사회적 책임과 현실을 기반한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작은 예수로 사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인격적 미덕을 실천함으로써, 사회에 개혁과 변화를 불러 일으키고 그리스도의 삶을 증언하는 곳이다.

그래서 복음을 통해 비복음화 된 세상과 치열하게 영적 전쟁을 하는 곳이 세상이고 삶의 터전인 것이다. 교회의 역할은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백성으로서의 자질과 덕성을 갖춘 시대의 군사로 서야 하는 곳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경에서 전하고 있는 구원의 목적과 구원의 의미도 모르면서 극단적 종말론을 논하고 외치는 것은 정작 종말을 두려워해야 할 세상에 명확한 답을 줄 수 있는 대안조차 될 수 없다. 

극단적 시한부 종말론은 미래를 폐쇄적이고 현재의 삶을 무책임하게 만드는 오류를 양산한다. 교회는 종말론적 시각이 가져올 수 있는 제한적인 관점을 넘어서, 보다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실천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교회가 선교와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보다 실질적이고 지속 가능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처녀 (마25), 충성된 종 (마25, 히11), 양의 무리 (벧전5)로 부름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앞에 설 날을 말씀으로 깨어 예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세속적 종말주의자들의 그림자
세속적 종말주의자들의 그림자 photo by 기독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