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정문 입구 양쪽 앞에 예쁘지는 않지만 작은 화분을 두 개 놓았는데, 화분 안을 날마다 뒤져 흙을 밖으로 쏟는 일이 생깁니다. 신경이 쓰이는 가운데 누구 짓인지 궁금했는데 어느 날 주인공이 다람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람쥐는 겨울 준비하기 위해서 가을의 결실이라는 도토리를 입에 불룩 담아 열심히 땅에 묻는다고 합니다.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서 몇 군데가 아닌, 수십 군데에 도토리를 묻어 둔다는 겁니다, 문제는 너무나도 많은 곳에 묻어 두었기 때문에 자기도 어디에 묻었는지를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의 통계에 의하면 다람쥐가 겨울철에 도토리를 다시 찾을 수 있는 확률은 겨우 1/10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람쥐의 헛수고를 이야기할 것이고, 열심히 묻어두는 다람쥐의 무의미한 행동을 지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다람쥐가 잊어버린 도토리 때문에 몇 년 후 참나무 숲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상상 초월의 도토리를 다시 돌려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편적 진리에 힘을 얻을 것은, 내가 무엇을 했다는 것이나. 내가 발견한 결과라는 것이, 만약에 땅에 묻은 도토리와 같이 지금 결과를 보지 못하고, 잊어버렸다 할지라도, 그래서 내가 참으로 무의미한 일을 한 것인가? 생각을 해도, 그것이 얼마를 지나지 않아 참나무 숲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믿음도, 최후 승리를 믿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물론 무조건 끝이 좋아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최후승리를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란 당장에 나타나지 않는 결과주의에 매몰이 되어, 열매 없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는 지금의 초라한 내가, 실패한 내가 결코 허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결과주의에 매달려 산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순종 못하는 이유도 당장 결과가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눈에 보이는 결과 없다면 금방 낙심을 하고 좌절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과정의 신앙과 결과의 신앙은 확실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과정의 신앙은, 항상 예수님과의 동행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과정의 어떤 부분도 버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하나님 나라에는 쓰레기통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과정의 신앙은 예수님께 믿고 맡기는 것이요, 주님을 의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성해서 결과가 보이면 즐거워하면 됩니다. 그러나 충성을 했는데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면, 참나무 숲이 되어 돌아올 것을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절망은 없고 오직 소망뿐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