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서도 사람다운 삶을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시사전문지 '애틀랜틱(The Atlantic)'의 기자 소피아 길버트는 '인간이 되기 위한 공부(Learning to Be Human')라는 기사를 통해 기술 중심으로 급변하는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인문학이 필수라고 주장했습니다. 소피아는 "문학, 역사, 예술, 음악, 철학 등 인문학이 알려주는 인간적인 삶과 그에 대한 해석은 과학이나 기술로는 풀 수 없는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수년 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실시한 인문정신문화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민 상당수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인식한다고 나타났습니다. 반면에 국민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우리 사회에 인문학이 필요하다'라는 응답은 68.4%로 높았습니다.
'인문학이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에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성찰하므로'라는 응답이 64.8%로 가장 높았습니다. 하지만 적용과 실천 그리고 인문학적 소양 높이기는 어려운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내용이 어렵고 추상적이라서'가 39.3%, '취업 및 직장 업무에 직접적 관련성이 적어서'가 25.2%로 집계돼 인문학의 접근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중요성은 알겠는데 정확한 개념도 근접 가능한 자료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출발은 로마 인문학의 출발과 동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키케로보다 조금 늦게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한 신약 성경은 기독교 인문학의 진수입니다. 기독교는 문서 운동입니다. 신앙의 진수를 전한 복음서와 서신의 저술, 유통 그리고 탐독의 과정이 매우 인문학적입니다.
초대 교회가 기독교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문서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읽었던 것은 상당한 수준의 인문학 운동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배우고 훈련받는 속사도 교부들(Apostolic Fathers)이 중요한 신앙의 가르침을 문서로 남긴 것은 시대와 그 상황을 이해한다면 놀라운 일입니다.
초대교회 인문학 운동에 기수는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인문학을 대표하는 키케로와 세네카와 중복되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 1월 3일에 태어나 기원전 43년 12월 7일 사망했고 세네카는 기원전 4년에 태어나 기원후 65년에 사망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기원후 5년경에 태어나 기원후 67년경에 사망했다고 추정합니다.
바울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키케로와 세네카와는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이 길리기아 다소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대에 다소는 길리기아 지역의 정치적 수도였습니다. 로마의 웅변가요 정치가요 인문학자였던 키케로가 이곳 총독을 지냈습니다.
바울과 세네카는 키케로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키케로가 총독을 지낸 길리기아 출신이었고 세네카는 키케로의 뒤를 잇는 대표적인 인문학자였습니다. 신약성서 외경 중에 '세네카와 바울의 왕복 서신'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 행전'과 '바울묵시록'과 더불어 바울과 관련된 외경 중의 하나입니다. 그만큼 바울과 세네카 사상과 인문학적 소양이 닮은꼴이었다고 합니다.
키케로는 기독교 신앙과의 관계가 거의 없습니다. 단지 걸출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키케로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키케로는 로마 시대 스토아 철학의 대표주자였습니다. 키케로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철학을 일깨웠으며 지속해서 철학을 추구하게 했다고 알려집니다.
바울은 대표적인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를 잘 알았습니다. 바울이 교육도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당시 길리기아 인문학적 소양을 습득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인문학적 소양이 확실하게 드러난 상황이 사도행전 17장 아테네 설교입니다. 학자들은 바울이 아테네 설교에 세네카의 말을 다섯 번 인용했거나 활용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바울은 세네카 사상에 정통했고 아테네 철학자들과 시민들을 설득하는데 활용할 만큼 세네카를 존중했습니다.
바울은 당대에 가장 설득력 있는 세네카를 포함한 당대 철학자와 명문장을 인용하면서 청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설득했습니다. 문화적 자부심에 충일했던 아테네 철학자들과 시민들이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반론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 자신들보다 세네카를 더 잘 아는 바울 논리에 감복했을 것입니다.
바울 외에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도 편지를 썼습니다. 이들의 상황이 편지를 쓰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한결같이 편지를 써서 성도들을 설득하고 믿음을 독려한 것은 인문학의 영향이라 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서신은 당시 수사학이 설득의 수단으로 강조했던 자료입니다. 당시 정치인이 편지로 대중을 설득하고 후원을 유도하고 새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바울을 포함한 사도 시대가 끝나자 사도들을 이어서 등장한 인문들이 속사도 교부(Apostolic Father)들입니다. 이 속사도 교부들이 척박한 땅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정신과 삶 그리고 사도들의 신앙을 전했습니다. 이들이 초대 교회를 유지하고 그 신앙을 이어간 수단 중의 하나가 글이었습니다.
속사도 교부들이 글을 남겼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들은 지독한 가난과 고통의 삶을 살았고 사형수가 되어 압송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편지를 써서 성도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들이 남긴 자료들은 신약 성경 다음으로 권위를 가진 문서였습니다. 이 글들은 지금 읽어도 감동이 되는 건강한 권면과 설득입니다.
기독교는 문서 운동이고 인문학 운동입니다. 기독교는 읽고 듣고 배워야 하는 경전 종교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 건강한 독서가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고 기독교 고전들을 읽어야 합니다. 현대 교회가 초대 교회보다 천박하고 깊이나 영향력 면에서 약해진 이유를 기독교 인문학의 약화에 기인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공감합니다. 현대 교회는 인문학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