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다툼이 있습니다. 죽도록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도 다툼이 있고, 그토록 원하다가 낳은 자녀와 부모 사이에도 다툼이 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라고 믿는 교회 안에서도 역시 다툼은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속에 일어나는 다툼을 분석해보면 정말 목숨을 걸어야할 만큼 심각한 문제 때문에 다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지극히 하찮은 것을 가지고 다투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툼의 당사자들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겠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바라다 보면 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 속에 다툼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요인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배려하는 마음의 결여입니다. 자기 입장에서만 말하고 행동하는 것 때문에 상대방이 어떤 상처를 입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데서 다툼이 생깁니다.

미국에 오래 살다가 한국에 가면 가장 곤혹스러운 것 가운데 하나가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는 경우입니다. 미국은 서로 부딪히는 것을 아주 미안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걸어다닐 때 무척 조심을 합니다. 그러다가 실수로 부딪히면 정말 미안한 마음으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에게 “미안하다”라는 말을 건냅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분주한 삶에 적응 된 한국사람들은 서로 부딪히며 사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거리에서나 지하철 속에서 부딪혀도 서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에 미국식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건내면 오히려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문화의 차이라고 말하기 전에 이것은 배려함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을 때 먼저 미안함을 가지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냥 지나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부잣집에 초청을 받아 가셨습니다. 유대 풍습에 귀한 손님이 오시면 먼저 종을 시켜 그분의 발을 씻겨 드립니다. 극진한 손님이 방문할 경우에는 주인이 직접 손님의 발을 씻겨 드리는 것으로 손님에 대한 최상의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그 부자집 주인은 예수님을 초청해놓고 발 씻을 물도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을 보면 그 주인이 전에 문둥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께서 고쳐 주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발 씻을 물 조차 내어놓지 않았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자기의 머리 털로 닦아내고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엄청나게 귀한 향유가 예수님의 발 위에 쏟아지자 곁에 섰던 집 주인이 먼저 그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감히 죄인인 주제에 어떻게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릴 수 있느냐며 분노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회계를 맡고 있던 가롯 유다가 합세해서 그 비싼 향료를 어찌 그렇게 허비할 수 있느냐고 그 여인의 행동을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 여인을 칭찬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예비하지 않을 때에 오직 이 여인만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고 미리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칭찬에 그치치 않고 복음이 전해지는 곳곳 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행한 거룩한 배려도 함께 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배려하지 않을 때 이 여인만이 가장 귀한 것으로 예수님을 배려하였고 아무도 예수님의 불편을 눈치채지 못하였을 때 오직 이 여인만이 그것을 알고 예수님의 불편하심을 정성껏 배려했습니다. 또한 아무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듣지 않을 때 오직 이 여인만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듣고 그 일을 미리 예비한 것입니다.

남을 배려하며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이 여인처럼 때때로 나의 배려가 다른 사람의 시기와 질투를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배려한다고 행한 일들을 보고 남들은 하지 않는데 자기만 잘난 척 한다는 비난의 초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내 안에 배려하는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배려하는 마음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없으면 생기지 않으며 내 중심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사람을 기대하면 결코 배려하는 행동이 나올 수 없습니다. 모든 상황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단정해 버리면 배려의 여유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왜 스스로의 외로움을 자초합니까? 왜 조그마한 일이 큰 다툼으로 번져 나갑니까? 남은 배려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 다른 사람의 배려를 받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만 고집하고 상대방의 의견은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내 입장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상대방의 입장은 전혀 고려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작은 일만 생겨도 모든 것을 걸고 다투게 됩니다. 한번 밀리면 자꾸 밀린다는 생각으로 전력을 다해 다투게 됩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다툼 뒤에는 승자는 없고 오직 패자들만 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분명 이기기 위해 시작한 다툼이었는데 모두가 상처 투성이인 패배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내 안에 배려하는 마음이 꼭 필요한 이유는 다툼을 없애줄 뿐만 아니라 설혹 서로 다투더라도 모두에게 이기는 기쁨을 맛보게 합니다.

배려하는 마음은 처음에는 지는 것 같고,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이기는 길이요 얻는 길입니다. 내가 배려해야만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죄인된 나를 배려해 주셨기 때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